시진핑, 서열 5위 류윈산 파견 … 북·중 관계 복원 기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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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5 면

북한 김정은(오른쪽)이 10일 평양 김일성광장 주석단에서 류윈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손을 붙잡고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고 있다. [AP=뉴시스]

‘최고존엄’의 옆자리에 중국이 서고 러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이 열린 평양 김일성광장의 주석단 모습이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오른쪽에 2인자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을 세우고 왼쪽 자리는 류윈산(劉雲山·서열 5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내줬다. 이는 2010년의 노동당 창건 65주년 열병식 때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저우융캉(周永康) 당시 상무위원과 나란히 선 것이나 똑같은 자리배치다. 김정일 시대의 원만했던 북·중 관계의 복원을 예고한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류 상무위원은 이날 주석단에 입장할 때도 바로 김정은의 뒤를 따랐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김정은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간간이 TV화면에 잡혔다. 누가 뭐래도 북·중 간 혈맹관계에는 변함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를 향해 보낸 셈이다. 류 상무위원은 주석단에 선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중국이 이번 열병식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건 분명해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김정은에게 축전을 보낸 것과 별도로 류 상무위원을 통해 친서를 전달했다. 시 주석으로선 초유의 일이다.


시진핑 체제 후 최고위급 인사 방북류 상무위원은 시진핑 체제 출범 후 북한을 방문한 최고위급 인사다. 지난달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북한이 최용해 노동당 비서를 파견한 것과 균형을 맞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십 명 규모의 대표단을 이끌고 간 점 ▶근래 중국 고위층 방북으로선 전례 없는 나흘 일정이란 점 ▶격을 갖춘 공식방문이란 점을 고려하면 의례적인 축하 사절을 뛰어넘는, 사실상 시 주석의 특사인 셈이다. 김정은은 9일 국빈급 영빈관인 백화원 초대소에서 류 상무위원을 만났다. 회담장에서 김정은이 대단히 흡족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TV화면을 계속 채웠다.


시 주석이 친서와 축전을 통해 각별히 강조한 것은 전통 우의였다. 시 주석은 친서에서 “중국과 조선(북한)의 선대 지도자들 사이에 쌓아온 전통적 우호관계는 양국이 공유하는 귀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축전에서는 ‘대대상전(代代相傳)’이란 말을 사용했다. 대를 이어 우호관계를 전해 나가자는 의미다. 그는 또 “근년에 김정은 노동당 제1서기 동지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서기의 유지를 계승하고 당과 인민을 영도하며 경제 발전과 민생 개선 등의 방면에서 적극적인 진전을 이뤄냈다”며 김정은을 평가하기도 했다. 외교수사임을 감안해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김정은은 “조·중 관계는 단순한 이웃 관계가 아니라 피로써 맺어진 친선의 전통에 뿌리를 둔 전략적 관계”라며 “조·중 친선을 대를 이어 더욱 공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의지”라고 화답했다. 시 주석과 김정은이 전통 혈맹의 복원을 합창하고 나선 셈이다.


두 나라가 관계 전환의 계기로 삼기엔 이날 노동당 창건 기념 행사가 더 없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북·중 관계는 전통적으로 정부 간 외교관계보다는 노동당과 공산당 간의 당대당(黨對黨) 외교에 의존해 왔다. 이는 당이 정부를 지도하는 두 나라 체제의 공통점과 중국 혁명 및 한국전쟁 시기에 맺어진 양국 지도자들의 특수관계에 따른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우리의 찬란한 오성홍기(중국 국기)에는 북한 혁명열사들의 선혈이 묻어 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핵문제엔 북·중 관영매체 보도 온도차그런 혈맹 관계에 처음 균열이 생긴 건 1992년 한·중 수교 직후였다.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북한은 상당 기간 중국과의 교류를 중단했다. 2000년대 이후 김정일의 빈번한 방중이 상징하듯 북·중 관계는 복원됐다. 하지만 북에서 김정은 체제, 중국에서 시진핑 체제가 출범한 이후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이렇게 말한다. “시 주석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13년 2월 중국의 우려를 무시하고 뒤통수를 친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이었다. 2012년 11월 공산당의 대권을 잡고 국가주석 취임(3월)을 코앞에 둔 시 주석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시 주석이 전임자들에 비해 ‘북핵 불용’ 입장이 확고한 데엔 그런 내력이 있다.” 그해 12월 중국에 인맥이 두터운 장성택이 숙청된 것도 북·중 관계에 악재로 작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 주석은 지난해 7월 그동안의 전통을 깨고 한국을 먼저 방문했고 북·중 간에는 고위 인력교류가 단절되기 이르렀다. 북한은 대신 러시아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강화했다.


류 상무위원의 방중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양국의 타산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인다. 시 주석은 경색 상황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지렛대를 갖는 것이 중국의 전략적 이익에 도움이 되고 외교 자산으로도 활용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북한으로선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절대적일 뿐 아니라 대중 관계 복원을 통해 국제사회의 압박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게 이점이다.


주목할 대목은 김정은의 방중으로 이어질지 여부다. 시 주석은 친서에서 ‘긴밀한 소통’을 강조했다. 류 상무위원도 양국 간 고위층 교류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양국 관영매체의 보도에선 명시적인 표현이 보이지 않지만 김정은의 중국 방문이 논의됐을 것으로 추론하는 충분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북·중 관계의 개선을 점치기엔 아직 이르다는 관측도 나온다.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인 북핵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류 상무위원과 김정은의 회담 소식을 전한 양국 관영매체의 보도에서도 북핵 문제에선 차이가 난다. 중국 매체는 “중국은 조선반도의 평화안정 수호와 비핵화 목표 등을 견지한다”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한 류 상무위원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는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 공동 노력하기를 원한다”고도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선 이 부분이 쏙 빠졌다.


시 주석은 지난달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북핵 불용 입장을 재확인한 바 있다. 국제사회에 공약한 이 입장을 시 주석이 쉽게 거둘 순 없고, 따라서 관련국이 한목소리로 내는 핵개발 중지 압박에 중국이 빠질 수도 없다. 그렇다고 김정은이 쉽게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힘들다. 관계 복원의 필요성과 핵개발에 대한 입장 차이, 그 엇갈리는 두 갈래길 사이에 김정은과 시진핑 주석이 서 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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