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항로 vs 일대일로 … 러·중, 물밑 선 ‘물류전쟁’ 준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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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11면

한때 사회주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신(新)밀월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대러시아 제재, 그리고 G2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에 맞서기 위해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밀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양보할 수 없는 일전을 치르게 됐다. ‘물류전쟁’이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와 러시아의 북극항로 및 북극권 개발 야망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곰(러시아)과 용(중국)이 칼을 단단히 갈고 있다.


일대일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일대)와, 동남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일로)를 합한 말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제시한 ‘중국의 꿈’이 담긴 거대 프로젝트다. 육·해상 실크로드상의 60여 개국과 국제기구가 참가한다. 대규모 물류 허브 건설, 에너지 기반시설 연결 등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이를 위해 400억 달러에 달하는 신실크로드 펀드를 마련하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통해 인프라 구축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북극항로 상용화와 북극권 활성화로 새 물류대국을 꿈꾸는 러시아로서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믈라카 해협~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한·중·일의 물류를 북극항로로 돌리면 이동시간이 10일 정도 단축된다. 러시아는 이런 경제적 이점을 활용해 북극 개발에 속도를 내고 싶어한다. 그런데 막강한 경쟁자인 중국이 새로운 루트를 적극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북극해 루트를 유라시아의 새로운 주·간선 물류 루트로 만들기 위해선 물동량 확보가 필수적이다.


러, 중국의 야망 이용하려 AIIB에 투자러시아의 이런 고민은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북극사업단(단장 김석환 교수)이 지난달 21일 모스크바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에서 개최한 전문가 간담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바실리 미헤예프 IMEMO 부소장은 “러시아는 처음에 북극항로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일대일로에 부정적이었다”며 “G2로 대접받는 중국이 러시아가 대적할 수 없는 공산주의 맹방이 되는 것을 저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AIIB의 초기 자본금 1000억 달러(약 117조원) 가운데 6.66%를 투자했다. 지분율로는 중국(30.34%)·인도(8.52%)에 이어 셋째다. 한국의 지분율은 3.81%로 독일(4.57%)에 이어 5위다. 미헤예프 부소장은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단순한 경제적인 측면 외에도 중국의 야망을 이용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미국을 상대로 같은 배를 타면서 겉으로는 중국과 손을 잡고 있지만 ‘동상이몽’의 뿌리 깊은 불신은 여전히 깔려 있다는 뜻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사회주의 주도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해왔다. 김석환 교수는 “일대일로와 북극해 루트를 단순한 경제·물류적 측면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며 “결국 이는 유라시아의 물류망과 자원을 활용하고 확보해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경제와 안보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각국의 장기적·지정학적 전략이 결합돼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약점은 ‘실탄’이다. 북극권 개발에 필요한 자본이 충분하지 않아 외부의 투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북극 투자에 가장 관심이 많은 나라가 중국이다. 일대일로와는 별개로 중국은 기후변화로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북극 진출에 적극적이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화물량이 세계 최대인 데다 북극권의 에너지 및 각종 자원의 확보가 점점 절실해지기 때문이다. 북극권 개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러시아는 중국의 이런 야망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상호 협력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두 나라의 관계다.


중국은 러시아 인프라·에너지에 적극 투자중국은 러시아 가스회사인 노바텍(Novatek)과 프랑스 토탈(Total)이 대규모 투자한 ‘야말 프로젝트(시베리아 서쪽 야말반도에 위치한 천연가스전을 개발하는 사업)’에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을 참여시켰다. CNPC의 초기 지분율은 20%였다. 노바텍이 60%, 토탈이 20%였다. 최근 CNPC는 지분율을 29%로 늘렸다. 노바텍이 9%의 지분을 매각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방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의 북방연방대 오흐롭코바 교수는 “중국이 사하공화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공세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니기타 로마긴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에 신규로 투자하는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며 “중국이 야말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 것은 양국이 북극항로의 개발에서 주도권을 확대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일대일로와의 물류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자신들이 추진하는 북극해 주변 항구 개발에 중국을 참여시키고 있다. 동해로 직접 통하는 항만이 없는 중국이 러시아의 항구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5월 러시아 최대 항만운영기업인 슈마그룹과 30억 달러(약 3조1000억원)를 투자해 2018년까지 자루비노항을 연간 물동량 처리능력 6000만t 규모의 항만으로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자루비노항은 러시아의 극동 해안 연해주 남쪽에 위치한 부동항으로 중국 국경과의 거리가 불과 18㎞밖에 되지 않는다. 철도와 도로로 중국 지린성 훈춘시와 바로 연결된다. 그러나 자루비노항의 기반 시설이 낙후돼 그동안 중국이 이를 통해 동해로 진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 러시아 북극지역의 자원개발과 운송 인프라가 낙후돼 본격적인 지역개발과 경제발전을 위해선 인프라 건설이 시급하다. 중국은 이것을 기회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극동·북극권서 새 기회 잡아야”김 교수는 “중국이 북극항로 및 북극권 지역 개발에 전략적인 관심을 갖고 접근하자 러시아가 긴장하면서 ‘큰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며 “한국도 단기간의 경제적 관점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동북부에 새롭게 열리는 광대한 경제영토를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학기 산업연구원(KIET) 해외산업팀장도 “한국 경제가 더운 중동에서 제1의 경제성장 기회를 잡았듯이 새롭게 열리는 경제영토인 추운 극동과 북극권에서 제2의 경제성장을 모색할 때”라고 밝혔다.


하지만 걱정의 목소리도 있다. 북극항로와 일대일로가 벌이는 ‘물류전쟁’은 중국 경제의 불안이 지속되고 세계 경제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면 생각보다 먼 훗날의 예고편으로 끝날 수도 있다. 김학기 팀장은 “북극항로와 일대일로가 경쟁하기에 앞서 이들 루트를 이용할 수 있는 물동량을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모스크바=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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