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노향림(1942~ ),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신 햇빛 아래 소리없이 핀

작디 작은 풀꽃들,

녹두알만 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고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이제 지는 꽃은 보지 않겠습니다. 피는 꽃만 보지요. 그런 욕심, 그런 소망, 그런 이기심으로 떠난 것을 다 지우고 화려함도 지우고. 모든 경계 다 지워서 당신과 와글와글. 무명(無名)으로 와글와글. 떨어지는 꽃 속에도 피어있겠습니다.

박상순<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