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석의 걷다보면]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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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의 지도자들은 민중 또는 국민이 역사의 주체요,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우리 민중은 단 한 번도 역사의 주체나 나라의 주인으로 대접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농민이나 노동자가 처해 있는 형편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 신경림,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몇 해전이었던가. 어느 단체에서 주관한 신경림 시인의 강연회 장소였다. 시인은 나지막하고 차분하게 시 한 편을 노래한다. 그 노래를 듣고 있던 내내 눈물이 흐른다.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시는 신경림 시인이 20여 년 전 한 젊은 연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시였다. 어느 비좁고 허름한 지하실에서 치러진 작은 결혼식(당시 남자분이 노동운동으로 지명 수배중이었다고 합니다)에서 신경림 시인이 주례를 서고 이들의 결혼에 축하 시를 써주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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