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누가 내 이름 석자 뺏는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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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일본 집권당의 한 간부가 지난달 31일 도쿄(東京)대 강연에서 "일제 때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당시 조선인들이 성씨를 원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우리 정부는 유감 표명과 함께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부 집권 자민당 의원들은 망언에 동조했다. 창씨개명이 이뤄진 배경과 일본의 역사 왜곡 실태 등을 공부한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내 이름자를 써보고,/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 시인 윤동주(1917~45)의 '별 헤는 밤'의 일부다. 이 시엔 그의 창씨개명에 따른 수치감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되찾을 날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담겨 있다. 시를 지은 시기는 1941년 11월 24일. 일제가 조선인의 성씨(姓氏)을 폐지하고 일본식으로 고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때다.

일제는 39년 11월 30일 우리 민족의 '황민화(皇民化.일본 천황의 백성으로 만드는 일)'를 촉진하기 위해 창씨개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으나 응한 가구는 6개월 동안 7%에 불과했다. 다급해진 조선총독부는 갖가지 불이익을 줘 그 후 한달 동안 79.3%로 끌어올렸다.

조상과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민족이 7개월 동안 80% 가까이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은 일제의 강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창씨를 하지 않는 호주는 노무징용에 우선 끌려갔고, 그 자녀는 학교 입학을 못하게 했다. 식량 배급도 하지 않았으며 취업까지 막았다. 행정 민원서류도 뗄 수 없었고,우편 배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윤동주는 실제로 42년 1월 29일 평소동주(平沼東柱)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그가 다니던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에 냈다. '별 헤는 밤'을 쓰던 시기에 그는 졸업반이었고, 일본 유학을 준비했다.

창씨개명의 수치를 감수하고 유학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 컸고, 시로 승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존재의 상징이다. 이름의 상실은 곧 동물적인 삶을 뜻한다. 이름을 빼앗긴 삶을 벌레의 삶으로 비유한 데서도 나타난다. 결국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은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윤동주 자신의 우리말 이름이었던 것이다.

※참고:유재천(경상대 국문과)교수의 논문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의 비유 구조'

이태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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