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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섬유소 "나 없이 살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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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의 제왕.'섬유소를 일컫는 말이다. 섬유소란 식물의 줄기와 잎을 구성하는 질긴 성분(그래픽 참조). 섬유소는 영양학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백지 상태다.

열량은 물론 단백질과 탄수화물.지방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영양소는 찾아볼 수 없다. 신진대사를 조율하는 비타민과 무기질도 없다. 게다가 맛도 없고 질긴 것은 물론 소화나 흡수도 잘 안 된다.

그러나 섬유소는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다. 섬유소의 중요성은 캡슐 식품의 딜레마로 설명된다. 캡슐 식품이란 1960년대 우주선 개발 당시 과학자들이 식품의 적재량을 줄이고 처리 곤란한 조종사의 대변 양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

캡슐 하나에 비타민과 아미노산 등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담았다. 이론적으로 인간은 설탕물과 함께 끼니 대신 캡슐 서너알이면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우주비행사들의 업무능률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입에서 항문까지 수백만년 동안 섬유소에 길들여진 인간의 소화기관이 섬유소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 때문이다. 오늘날 우주 정거장에서 장기 체류하는 우주비행사들은 섬유소가 포함된 튜브 형태의 액상식품을 먹는다.

현대의학이 밝혀낸 섬유소의 역할은 화려하다. 섬유소는 영양과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포만감을 유발해 숟가락을 놓게 하며 음식 중 당분과 지방의 흡수 속도를 줄여준다. 혈당이 천천히 올라가므로 췌장의 부담을 줄여주고 인슐린 과잉분비로 인한 당뇨와 동맥경화.비만을 막는다.

청소부 역할도 한다. 혈관과 대장에 덕지덕지 붙은 노폐물을 수세미로 문지르듯 깨끗하게 제거해준다. 섬유소가 심장과 대장의 보약으로 칭송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섬유소를 많이 섭취하면 심장병과 대장암 발생률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삶의 질을 파괴하는 대장 질환에도 섬유소가 특효약이다. 대변 양을 늘이고 대변을 빨리 배출해 변비를 예방하고 과민해진 대장 점막을 길들임으로써 과민성 대장증후군의 극복을 돕는다.

그러나 섬유소에 관한 한국인의 성적표는 낙제점이다. 한국영양학회 등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하루 평균 섬유소 섭취량은 17~20g 정도.

특히 청소년과 어린이는 대부분의 조사에서 10g 이하로 나타나고 있다. 미 국립암연구소가 추천한 하루 평균 섬유소 섭취량인 25~30g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섬유소를 어떻게 섭취할 것인가. 일단 섬유소의 보고인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 흰 쌀밥보다는 현미밥이, 감자보다는 고구마, 김치보다 오이나 당근이, 사과보다 배가 섬유소 측면에서 유리하다.

문제는 섬유소가 질기고 맛이 없다는 것.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 박상철 교수는 나물을 권유했다. 박교수는 "나물은 섬유소를 부드럽게 하고 부피를 줄여줌으로써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양념을 곁들여 입맛을 돋울 수 있다"며 "실제 1백세 이상 장수노인의 식단 분석 결과 나물이 가장 선호하는 식품으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양 못지않게 질도 중요하다. 서울대의대 내과 송인성 교수는 "김치나 콩나물처럼 부피만 차지하는 거친 섬유소보다 당근.양상추.브로콜리 등 입안에서 물기가 질겅질겅 씹히는 이른바 함수성이 높은 부드러운 섬유소가 좋다"고 말했다.

주의사항도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따라 가듯 섬유소엔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물없이 섬유소만 많이 섭취하면 노인의 경우 드물지만 딱딱한 대변으로 장폐색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채소와 과일을 먹은 뒤엔 한 두 잔의 물을 곁들이도록 하자.

위장에 부담이 되는 것도 흠이다. 섬유소가 위장 점막을 자극해 속쓰림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위염이나 위궤양 등 위장이 나쁜 사람에겐 물에 녹지 않는 불용성 섬유소보다 물에 녹는 수용성 섬유소가 권장된다.

미네랄이 포함된 영양제를 복용하는 것도 좋다. 섬유소는 식품 속에 포함된 철분이나 아연.칼슘 등 미네랄을 대변으로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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