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갉아먹는 조작된 ‘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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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14면

스콧 피츠제럴드

우리는 가끔 엄청난 허풍을 떠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만약 정치를 했으면 대통령도 되고 남았을 사람이야. 최소한 국회의원은 됐겠지.”“내가 이렇게 조용히 살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으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지.”“내가 왕년에 영화배우 뺨치게 멋있었다니까.”


그럼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럼 왜 그렇게 마음을 안 먹었나요? 마음만 먹으면 됐을 것을, 왜 마음 따라 살지 않았나요?”


허풍은 남에게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한껏 부풀리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허풍선이들만 이렇게 화려한 상상놀음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조금씩 상상은 해본다.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더라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나한테 좀 더 힘이 있었다면….


그런데 그런 가정을 할 때마다 우리의 자아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은 ‘그때 내가 성공한 남자였다면’이라는 가정 속에서 평생 자신을 괴롭힌다. 그때 내가 부자였다면, 성공했다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였다면, 그녀가 나를 받아주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개츠비는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게 된다.


데이지와 개츠비는 젊은 시절 한때 불꽃처럼 사랑했지만, 이미 톰과 결혼한 지금의 데이지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데이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성공해서 돌아온 개츠비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바로 데이지의 아이다. 데이지의 아이를 마치 유령 쳐다보듯 넋 빠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개츠비는 ‘그녀가 결혼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끊임 없이 데이지에게 과거 두 사람의 ‘가장 멋진 시절’을 상기시킨다. 남편의 바람기와 자신에 대한 무관심 탓에 괴로워하던 데이지는 덜컥 흔들린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을 이 남자는 눈부시게 기억해 주니까. 그저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나를 그때 그 시절의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니까.

사랑을 위해 현실을 부정하다 하지만 흔들림은 거기까지였다. 데이지는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견딜 수 없다. 개츠비는 끊임없이 ‘데이지는 톰의 아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데이지와 자신의 재결합’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가망없는 노력을 쏟아 붓는다. 사람들은 개츠비를 ‘희대의 로맨티스트’로, ‘비운의 로맨틱 가이’로 기억하지만, 사실 개츠비는 옛사랑에 집착하느라 자신의 출생과 학력은 물론 인생 자체를 조작한 인물이기도 했다.


닉은 ‘개츠비가 조작해 낸 자기 이미지’와 ‘개츠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도 멀리 떨어져서, 개츠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려 했던 유일한 친구다. 닉의 눈에 비친 개츠비는, 오직 사랑하는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공들여 창조해 낸 호화로운 건물 속에서 오히려 소외당해 지쳐 보인다. 개츠비는 쉴 새 없이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를 유독 싫어하는데, 시계는 곧 ‘붙잡을 수 없는 시간’, 즉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꿈도 그 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점점 ‘현실의 나’와 멀어지는 인식의 장벽이 되어 버린다. 데이지를 향한 사랑은 본래 개츠비의 진정한 열망이었지만, 데이지가 처한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개츠비는 전형적인 ‘회피(avoidance)’의 심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의 데이지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개츠비를 사랑할 수 있는 낭만적인 여인이었지만, 현재의 데이지는 남편이 보장해 주는 안정적인 생활의 그물과 주변의 평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린 남자’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평생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다가 결국 진짜 자아와 대면하지 못하고, 자신이 창조한 가상의 자아를 껴안은 채 죽어간 비극적인 인물로 보인다.

영화 ‘위대한개츠비’ 중에서

천신만고 끝에 ‘조작된 나’를 완성하지만 누구나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충돌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진실된 노력을 하지 않고 ‘조작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 조작된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동일시가 심해지면 점점 현실적 자아와 멀어지게 되고, 자기가 조작해 낸 가짜 자아의 형상을 진짜로 믿어 버리게 된다. 진실한 나는 점점 현실에서 멀어지고 정작 자기실현에 써야 할 에너지는 자기 조작을 위해 쓰이게 된다. 개츠비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공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다. 그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는 커녕 오히려 이상적 자아를 확립하느라 천신만고 끝에 ‘조작된 자아’를 만들어 낸다. 결국 그 환상적 자아가 본래의 자아를 좀먹어 버렸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자아상(self image)과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하거나,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자아상이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되어 있을 때다. 물론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그 편견과 싸워야 한다. “그건 너답지 않아!”“나다운 게 뭔데?”이런 식의 대사가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타인의 눈에 비친 나’와 ‘내 눈에 비친 나’가 항상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향한 기대에 맞추기 위해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강인한 사람들은 타인에게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대범하게 즐기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핸들을 꽉 붙들 수만 있다면, 나를 향한 온갖 과도한 기대와 악성 댓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의 스토리’를 내 영혼과 내 힘으로 써나갈 수 있다. 그가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용감한 개츠비’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데이지에게 다가갔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내 마음을 내 삶의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을 ‘나’라는 전체를 이끌어 가는 최고의 조력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비친 모습’을 끊임없이, 좀 더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끝내 가려 버리지 않도록.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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