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 15개 치겠다던 강정호, 만루포로 약속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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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정호(28·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방망이가 벼락같이 돌았다. 방망이에 맞은 공이 날아가는 바로 그 순간, 신시내티 레즈의 포수 터커 반하트(24)는 홈런을 직감한 듯 온몸을 비틀며 아쉬워했다.

 강정호가 10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첫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이틀 연속 홈런을 날린 그는 올 시즌 자신이 밝힌 목표인 15홈런을 기록했다. 남은 24경기에서 강정호는 2006년 조지마 겐지(일본)가 세웠던 아시아 타자 데뷔 시즌 최다 홈런(18개)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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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호는 1-1로 맞선 6회 1사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신시내티 선발투수 키비어스 샘프슨(24)은 병살타 유도를 위해 초구부터 4구까지 모두 몸 쪽 직구(포심패스트볼)만 던졌다. 볼카운트 2-2에서 샘프슨이 선택한 공도 몸 쪽 직구였다. 시속 150㎞의 빠른 공이 약간 가운데로 몰리자 강정호의 배트가 날카롭게 뻗었다. 발사각 25.4도, 타구 스피드 시속 174㎞를 기록한 타구는 117m를 비행한 뒤 왼쪽 외야 관중석에 떨어졌다. 올해 피츠버그에서 처음 나온 그랜드슬램이었다. 5-4로 승리한 피츠버그는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2위(83승55패, 승률 0.601)를 지켰다.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강정호의 파워가 돋보이고 있다. 전날 경기에서는 8회 신시내티 네 번째 투수 콜린 블레스터의 커브(시속 124㎞)를 잡아당겨 관중석 2층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을 터뜨렸다. 공식 비거리 135m, 스탯캐스트 측정 145.1m로 거리로 따지면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7위에 해당하는 장거리포였다. 반발력이 덜한 느린 공을 받아쳐 초대형 홈런을 날린 게 특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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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호의 홈런 행진은 파워뿐 아니라 전략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의 왼발 움직임을 보면 강정호가 얼마나 영리하게 메이저리그에 적응 중인지 알 수 있다.

 강정호의 14·15호 홈런은 모두 레그킥(오른손 타자 이동발인 왼발을 들었다 놓으며 타격) 자세에서 나왔다. 올 시즌 개막전 그의 타격 폼은 논란의 대상이 됐다. 빅리그 투수들은 평균 시속 148㎞의 빠른 직구와 140㎞ 이상의 싱커를 던진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강정호가 한국에서처럼 이동발을 높이 들고 타격하면 미국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다. 하체 이동이 크면 파워를 모으기엔 좋지만 빠른 공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이나 호세 바티스타(토론토) 등 일부 A급 타자들만 레그킥을 한다. 강정호가 시범경기에서 부진하자 클린트 허들(58) 피츠버그 감독도 “레그킥을 계속할지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강정호는 2스트라이크 이전엔 레그킥을 하고, 2스트라이크에 몰리면 다리를 붙인 채 타격하는 ‘투 트랙’ 전략을 펼쳤다. 이때부터 강정호와 상대 투수들의 도전과 응전이 반복됐다.

 강정호는 두 가지 폼을 병행하면서도 좋은 타격 밸런스를 유지했다. 지난 4월에는 홈런을 치지 못했지만 주전으로 나서기 시작한 5월엔 홈런 3개, 타율 0.298개를 기록했다. 그러자 상대 팀은 강정호가 직구를 노릴 때 레그킥을 많이 쓴다는 걸 간파했다. 이후 강정호는 볼카운트가 아닌 투수와의 리듬에 따라 다리를 올리고 내렸다. 6월 부진(1홈런, 타율 0.221)을 이겨낸 강정호는 7월 홈런 3개, 타율 0.379를 기록하며 이달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피츠버그가 강정호를 영입한 이유는 그가 지난해 한국에서 40홈런을 때릴 만큼 파워 넘치는 내야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힘자랑을 서두르지 않았다. 8월 이후 강정호는 거의 매번 왼다리를 들지만 움직임을 3분의 1 정도 줄였다. 많은 타석에 들어서면서 메이저리그에 맞는 레그킥의 크기와 리듬을 찾은 것이다. 타석에 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스마트한 강정호가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올스타전 이후 강정호는 홈런 11개를 날리며 후반기 팀 최다 홈런을 기록 중이다. 처음 3개월 동안 기관총을 꺼냈다면 이제 그의 미사일이 터지고 있다. 10일 현재 강정호는 내셔널리그 타격 20위(0.287), 홈런 40위에 올랐다. 내야수의 타격 성적으로는 빅리그 최고 수준이다. 그는 이미 4년치 연봉(총 1100만 달러·약 130억원) 이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정호는 “투수가 병살타를 유도하려고 몸 쪽으로 공을 던졌다. 2스트라이크 상황이어서 나도 모르게 방망이가 나갔다”며 “동점 상황에서 나온 홈런이어서 더 기뻤다”고 말했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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