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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숨어사는 아이 2만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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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진은 국적 없는 세 살배기 레퐁. 베트남 불법체류자 엄마는 레퐁을 한국에서 교육시키고 싶어한다. [프리랜서 오종찬]

“제 이름은 자혼기르. 일곱 살이에요. 옴마(엄마)·아빠, 그리고 한 살 어린 남동생 잠시드와 충북에서 살아요. 나무 자르는 창고 옆의 작은 집에서요.

 동생은 작년 10월께 이갈이를 했어요. 윗니 2개가 빠졌어요. 1년이 다 됐는데도 이가 나지 않아요. 동생은 썩은 이도 5개나 돼요. 어떨 땐 아프다고 징징대요. 그러면서 아빠에게 떼쓰죠. ‘ 형처럼 이 갖고 싶어. 병원에 가’. 그럴 때면 아빠는 ‘알았다’고만 해요.

 저는 가족 말고 친구가 없어요. 다섯 살 때인가 아빠와 함께 어린이집에 간 적이 있어요. 아빠는 어떤 아줌마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냥 돌아서 제 손을 잡고 집에 왔어요. 그때 문틈으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친구들을 봤는데 참 부러웠어요.

 그 뒤로 저는 동생하고만 하루 종일 놀아요. 아빠 친구가 주신 자전거 2대를 갖고 주변을 빙빙 돌아요. 옴마·아빠는 ‘절대 멀리 가지 말라’고 해요. 일전에 집에서 200m 떨어진 고깃집 마당까지 갔다가 옴마한테 붙잡혔어요. 옴마는 막 화를 냈어요. 위험한 도로로 다닌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는 걸까요….”

 자혼기르의 부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불법 체류자다. 한국에서 자혼기르와 동생을 낳았다. 원칙대로라면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해야 하지만 불법 체류가 탄로날까 봐 그것도 하지 못했다. 자혼기르와 잠시드는 그렇게 국적 없는 아이가 됐다. 아니, 공식기록상으로는 태어난 흔적이 없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병원비가 비싸다. 동생 잠시드가 치과에 갈 수 없는 이유다. 웬만큼 아픈 건 진통제를 먹고 참는다.

 자칫 잡히면 한국에서 쫓겨난다. 그래서 자혼기르의 부모는 형제에게 “멀리 가지 말라”고 한다. 부모는 “사실상 숨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학교 교육이나 어린이집 같은 보육 서비스를 누리기도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에는 자혼기르 같은 무국적 아이 2만 명이 있다. 성인 불법 체류자 수를 바탕으로 한 추정치다. 부모를 따라 합법적으로 한국에 온 뒤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 체류자가 된 아이도 5000명에 이른다. 이들 역시 의료·교육 서비스의 사각지대에서 지낸다.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은 “한국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해 신분과 관계없이 아동의 기본권을 보장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며 “불법 체류자의 아이들이라도 보육·의료 같은 서비스는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종권(팀장)·임명수·조혜경·김호·유명한 기자, 이성은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사진=신인섭·오종택 기자, 프리랜서 오종찬·김성태, VJ=김세희·김상호·이정석, 영상편집=정혁준·김현서, 디지털 디자인=임해든·김민희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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