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포트] '방과후 교실' 자원봉사 나선 주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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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내 아이 잘 키우기는 보통 엄마들의 지상과제다. 온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자녀 뒷바라지에 매달린다. 녹록한 일이 아닌지라 보통은 남의 집 아이를 걱정할 겨를이 없다. '마을 속 작은 학교' 엄마 선생님들의 존재는 그래서 더 빛난다.

이 학교는 서울 강북구에 사는 한 부모 가족의 초등학생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교실. 학교를 꾸려가는 이들은 '공적인 엄마'를 자처하고 나선 주부 자원봉사자들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1일 오후, 서울 수유2동 동사무소 2층에 있는 작은 학교를 찾아갔다.

◆ 아이들과 하는 전쟁은 즐겁다="오늘은 비가 오지요.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색종이로 우산 쓴 친구를 만들어보기로 해요." 색종이 접기 선생님 권길자(40.수유3동)씨가 목청을 높이자 한바탕 뛰놀던 아이들의 반가운 눈빛이 권씨에게로 쏠린다.

그래도 돌아앉아 동화책을 뒤적이거나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니는 아이도 있고 이유없이 계속 훌쩍이는 여자아이도 있다. 권씨의 되풀이되는 설명에 앉은뱅이 책상에 둘러앉은 30여명의 아이 손끝에서 형형색색 색종이 우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매일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꼭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흐뭇함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권씨를 도와 아이들을 다독이던 김미희(41.수유4동)씨는 "후유" 한숨을 돌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삼남매를 둔 김씨는 만 6년 넘게 남의 집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 교실에서 봉사를 해왔다. 올 3월부터 상근자가 필요하자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아예 매일 이곳으로 출근 중이다.

"처음엔 아이들이 눈도 잘 맞추지 않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어요. 웃지도 않았고요." 학교에서 곧장 이곳으로 오면 가방만 내려놓은 채 무표정하게 있던 아이들은 2~3개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달라졌다. 자원봉사자 전윤순(44.수유1동)씨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어느날 '엄마'라고 부르며 가슴에 와 안길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 이웃에의 관심이 탄생시킨 작은 학교=제2호 작은 학교인 이곳이 문을 연 것은 올 3월. 하지만 작은 학교의 역사는 1997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번째 작은 학교는 인근 수유3동 13평짜리 지하 공간에서 시작됐다. 이 지역 주부들의 풀뿌리 공동체인 '녹색 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회원 중 일부가 지역사회로 눈길을 돌리면서부터였다.

"처음엔 순전히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려는 욕심에서 시작됐어요. 그런데 이웃에 어려운 아이들이 있는 한 우리 아이들도 잘 자라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서민들이 몰려 사는 이 지역의 특성 때문인지 혼자 된 아빠.엄마 또는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 지역 일반 초등학교 한 학급 40여명 중 평균 10여명이나 됐다. '녹색 모임'의 엄마들은 팔을 걷어 붙였다. 일일찻집을 하고 주머니를 털어 5백만원을 모아 지하방을 얻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일일찻집과 바자를 계속 열어 현재의 좀더 큰 지하방으로 옮겼다. 내 아이처럼 돌봐준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부모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2년 전부터는 강북구청이 월세 40만원을 보조해줘 그나마 한숨을 돌리게 됐다고. 엄마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받은 구청은 동사무소에다 두번째 작은 학교를 만들어 이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 작은 사랑 나누는 '공적엄마'들=작은 학교에서 봉사하는 주부들은 30여명.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숙제를 돌봐주고 간식도 먹인다.

또 매일 매일 특별활동 시간엔 영어.요리.색종이 접기 등을 가르치며 운동 부족인 아이들을 위해 산에도 간다. 이를 위해 권씨는 색종이 접기 자격증을 땄다. 연극에 소질있는 엄마들은 연극으로 환경 교육도 한다.

이들은 약 2년 전부터는 부모들을 대신해 학교를 방문하고 연말이면 이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 집을 방문해 사랑의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 엄마'노릇도 한다.

"6년 전 삼남매 중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여가를 활용할 길을 찾아 나섰다"는 작은 학교 대표 김미선(45.도봉구 방학동)씨. 그는 "조금씩 조금씩 이웃에 관심을 갖다 스스로 의식화가 돼 여기까지 왔다"고 웃음지었다.

"시간이나 돈이 넉넉하냐고요? 약간의 사랑과 시간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주부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골목마다 작은 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봉사자 엄마들의 표정이 참 선하고 맑았다. 02-903-6604.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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