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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아직도 反美를 외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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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WAN) 연차 총회를 개막 첫날부터 흔들어 놓은 것은 영국 홀린저 미디어그룹의 총수 콘래드 블랙의 연설이었다.

세계에 3백여개 신문과 잡지를 소유한 그는 원래 말 거칠고 입심 좋기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선데이 텔레그래프와 미국의 시카고 선 타임스 및 예루살렘 포스트지 등이 그 사람 소유다.

연설의 화두는 세계 언론의 반미(反美)보도였다. 이라크전 당시 영국의 BBC 방송과 가디언지 등을 포함해 유럽 언론들이 미국과 부시대통령을 빈정거리는 보도에 열을 올렸다고 비난했다. 또 명분있는 전쟁을 치르는 미국을 깡패국가로 희화화한 것은 유럽의 열등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회의장은 환호와 야유로 엇갈렸다.

회의 첫날의 충격은 사흘 내내 참석자들간에 얘깃거리였다. 하지만 미국이 압도하는 '미국에 의한 평화(Pax Americana)'를 정색하고 부인하는 목소리는 듣기 어려웠다. 세계 85개국 주요 언론사 편집인과 발행인들이 대거 참석했지만 어느 누구도 수용을 거부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같은 시점 한국관련 기사들은 세계 속의 고도(孤島) 한반도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도쿄발로 전해진 노무현 대통령의 공산당 수용 발언이나 미군 차량에 숨진 두 여학생 1주기를 맞이한 대규모 반미집회 소식은 우리끼리의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이 바깥세상의 흐름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들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반미를 외치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지의 재닛 로빈슨사장과는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이라크전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자세에 관해 궁금해 했다. 나는 부시의 이라크전을 지지했던 본지의 어려운 결정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또 한국의 盧대통령이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의 반미정서와 반전시위를 잘 알면서도 쉽지 않은 정치적 결단을 내렸던 점을 상기시켰다. 나는 타임스지가 이라크전 개전 직전까지 이러저런 이유를 들어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결정되자 사설 지면을 모두 털어 미국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배경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던 과정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런 게 미국이다.

평소 따질 때는 철저하게 따진다. 그러다가도 일단 나라의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에 부닥치면 지도자의 결정을 지지할 줄 아는 게 미국 언론이다. 또 이런 언론사의 입장 선회에 대해 문제삼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

미국 지식인들은 평소 자신의 노선과 입장을 고집하다가도 국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엔 나라 편들기로 쉽게 돌아선다. 그러나 일단 사태가 종식되면 지난날 결정에 대해 정색하고 시비를 묻는다. 이런 게 또 미국이다. 이처럼 자정(自淨)노력이 작동하는 나라이기에 국제사회를 상대로 큰소리를 친다.

귀국 길에 접한 한국발 기사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괴롭히는 언론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주변의 말 한마디가 온 나라를 뒤흔드는 얄팍한 사회의 단면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언론을 상대로 또 국민에게 짜증내는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넋두리는 분명 국민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출구 없는 자기파괴적 논란 속에 우리 사회는 방향감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가 쉽게 외쳐대는 반미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정색하고 문제삼는 지도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동맹국을 빈정대고 반미를 부르짖는 우리 젊은이들의 반 이상이 미국 이민을 꿈꾸고 있는 정신질환을 우리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어느새 답답한 현실로 돌아왔다.

길정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