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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뮤지스땅스 어미 벌레' 최백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현동을 오가다가 낯선 통유리 박스가 눈에 띄었다.

지하로 통하는 출입구를 통유리 박스로 만든 것이었다.

높이 3m, 길이 7m 정도였다.

처음엔 지하철 입구인가 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지하철 표지는 없었다.

다만 출입문 위에 ‘MUSISTANCE’란 글씨만 보일 뿐이었다.

레지스탕스를 연상시키는 낯선 단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한번 들어가 보려 했더니 문이 잠겨 있었다.

작사가 김이나씨를 인터뷰할 때였다.

그녀는 지난해 저작권료 수입 1위의 작사가였다.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가수로 최백호선생을 꼽았다.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거니 하여 최 선생에게 카카오톡으로 사실을 전했다.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뮤지스땅스’ 한번 놀러오세요.”

오가며 궁금해 했던 바로 그 ‘뮤지스땅스’였다.

곽재민 기자와 함께 아현동을 지나칠 때 갑자기 내게 물었다.

“특이한 곳 같은데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사실 정확히는 잘 몰라. 최백호 선생이 한번 놀러 오라고 하긴 했는데…. 나도 궁금하긴 해”

“최백호 선생이라구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뮤지스땅스’라는 그 단어가 곽 기자의 궁금증을 유발시킨 게다.

새롭고 의미가 있는 일이면 알아보고 독자에게 전달해야하는 게 기자의 본능이다.

며칠 후 곽 기자에게서 통보가 왔다.

바로 그 ‘뮤지스땅스’로 취재를 가자고 했다.

그렇게 만났다.

최 선생은 목이 늘어진 듯 헐렁한 티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의 편한 차림이었다.

2012년 앨범 ‘다시 길 위에서’를 냈을 때도 그랬다.

인터뷰를 한답시고 차려입지 않았었다.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수더분했다.

갈색 셔츠가 예쁘다고 하자 세일할 때 1만5000원 주고 샀다며 웃던 기억이 떠올랐다.

곽 기자가 ‘뮤지스땅스’의 의미부터 물어봤다.

“음악의 뮤직(Music)과 레지스탕스(Resistance)의 합성어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지하에서 젊은 밴드들을 감싸 안고 어루만지는 데 적합한 이름 같아 직접 지었어요. 저항이란 이미지 때문인지 반대가 심했는데 등록해 놓고 버텄죠.”

이름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예서 하는 일을 물어봤다.

“음악인들을 지원하는 창작 공간입니다. 10년 앞을 내다보고 만들었어요. 연습실은 미국 버클리 음대보다 더 좋다는 친구들도 있더라구요, 공연장에서 바로 녹음해 앨범을 만들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 음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공간입니다.”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2011년부터 한국음악발전소 소장을 맡고 있어요. 생활이 어려운 원로 가수와 연주자 열 분을 선정해 도와드리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예요. 그래서인지 문체부에서 음악창작소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스케줄도 바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성격에 잘 안 맞아 손사래를 쳤지만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겨 맡았습니다.”

최 선생이 하는 일과 공간, 상상 이상이었다.

고작 높이 3m, 길이 7m 정도의 유리박스 출입구 아래에 300평 규모로 공연장과 2개의 밴드 연습실, 5개의 개인 연습실 등이 갖춰져 있다. 개인 연습실의 이용료는 시간당 4500원,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음악인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인디밴드의 요람이 될 만하다 싶었다.

인터뷰 후, 최 선생이 사진 촬영 전에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모니터로 인디밴드를 심사하고 있던 ‘땅벌레’(직원들이 스스로 ‘땅벌레’라 칭하고 최선생을 ‘어미벌레’라 불렀다.)들이 마무리 심사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인디밴드를 발굴하는 ‘무소속 프로젝트’의 심사였다.

금방 끝난다고 한 일, 생각보다 꽤 오래 걸렸다.

머리에 서릿발 내린 예순 중반의 이웃집 아저씨 같았던 최 선생, 모니터를 보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말도 못 붙일 만큼 신중한 표정으로 변했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한 인디밴드가 ‘땅벌레’들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았을 땐 안타까워하고, 같은 평가가 나왔을 땐 무엇보다 좋아했다.

“350개 팀이 참가했는데 기획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친구들이 많아요. 언젠가 ‘뮤지스땅스’ 출신 가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최 선생의 명함 뒷면에 ‘음표를 키우는 화분’이 그려져 있다.

지하에서 한국음악계의 터전을 일구는 ‘어미벌레와 땅벌레’들의 존재 이유일 터다.

그렇게 심사를 끝낸 후의 사진 촬영, 어깨를 가로질러 맨 카키색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총을 맨 레지스탕스가 아닌 가방을 맨 ‘뮤지스땅스’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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