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심훈의 영화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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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심훈은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였는데,3학년때 수학선생과 싸움을하고시험때 백지를 내 1년 낙제를 하기도 했고 4학년 때에는 독립만세에 가담해 6개월동안 감옥살이도 했다.
그 당시 그의동창생은 내외종간인 동요작가 윤극영·서재호·이희승 등이었다고하는데, 17세때 후작 이해승의누이와 결혼하였다.
부인은 신식공부를 안했으므로 결혼후 진명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고 해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훈이 중국에 갔다온 뒤로 까닭없이 사이가 좋지않아져서 1924년에 이혼하고 그뒤 안정옥과 재혼하였다.
심훈은 감옥에서 나온뒤 1921년 21세때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북경·남경·상해등지를 두루거처 항주에 있는 지강대학에서 국문학을 배웠다고 한다.
1923년에 귀국한후 석영 안석주와 사귀게 되어 이경손·최승일·김영팔·이승만과 함께 신극연구단체인 「극지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문기자로 첫출발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 이런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연극을 수련하고 놀아온 일재 조중환이 계림영화협회를 만들어 『장한몽』을 촬영하기시작하였다.
이경손이 각색하고 감독이 이경손, 주연이 김정숙과 주삼손이었고, 그밖에 강홍식·정기탁·김명순등이 출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한몽』을 촬영하는 도중 주인공 이수일의 역을 맡고있던 주삼손이 별안간 행방불명되었다.
감독을 맡은 이경손이 깜짝 놀라서 이 일을 심훈한테 의논하였다.
이래서 심훈은 이경손의 딱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해 주삼손대신 이수일로 부장하고 나가 영화를 끝내주었다.
이것이 심훈이 직접 영화에 출연해본 처음일이고 이것으로심훈은 영화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심훈은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그해 영화소설 『탈춤』을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그때이 소설의 삽화로 나운규·주삼손·김정숙등의 실연사진을 넣었다.
이것이 영화작가로서의 첫 시험이었다.
이 『탈춤』을 40일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다음 본격적으로영화를 연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 봄 그는 경도에 있는 일활촬영소에 가 촌전실감독 아래에서 영화수업을하였다.
그때 일활촬영소에서는 작품 『춘희』를 만들고 있었는데 심훈이 엑스트러로 등장하여 실연의 경험을 갖게되었다.
엑스트러로 어떻게 등장하였는고 하니, 무도화에서여러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는장면에 심훈이 어떤 여자와잠깐 나타났다가 즉시 사라져버리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심훈은 원래 외모가 준수한 미남이었지만 굵은테의 로이드안경을쓴 키가 훤칠한 그의 모습이 그영화에 나온 어느 남자보다도 인상적이었다고 그때 그 영화가 서울에서 상영되었을때 가서 보고온 사람의 이야기였다.
6개월동안의 수련을 마치고 귀국해 일본영화에 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큰 의욕에차있었는데, 때마침 계림영화협회에서 『장한몽』과 『산채왕』을 내놓은뒤 또다른 작품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탈춤』이 후보에 올라 이것을 심훈이 조금 더 손질해 찍어보려고 덤버들었다.
그러나 막상 손을 대보니까 여러가지 난점이 나타나 얼른 착수하기 힘들게 되었다.
첫째로 『탈춤』은 당시에 부르좌라고 부를수 있는 부유층 사람들의 생활상이기 때문에 스케일이크고 등장인물이 많았다.
이런 스케일이 큰 작품을 당시의 영화촬영시설을 가지고 감당해 나갈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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