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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포스 펌프를 세계 1위로 만든 아주 특별한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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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월 16일(현지시간) 오전 9시 덴마크 비에링브로의 이드래츠파크 수영 경기장. 세 아이의 엄마인 회사원 박지영(36·여)씨가 떨리는 마음으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관중들이 곳곳에서 태극기를 펄럭이며 ‘올림픽 수영 국가대표’인 박씨를 응원했다. 그는 세계 1위 펌프 회사인 덴마크의 그런포스그룹이 4년마다 여는 ‘그런포스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게임업체 넥슨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단편영화를 찍고 있다. 넥슨은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광고 회사 대홍기획 사무실에 ‘수요일 일찍 퇴근’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지난 5월 덴마크 비에링브로에서 열린 ‘그런포스 올림픽’에서 신현욱 한국그런포스 대표가 싸이의 말춤을 추고 직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각 업체]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5월 14~17일) 그런포스 본사가 있는 비에링브로는 만국기가 펄럭이는 거대한 올림픽 선수촌으로 탈바꿈했다. 세계 56개국의 83개 그런포스 자회사에서 1215명이 출전했다. 숙소는 비에링브로 인구 7500명 중 5000명에 이르는 본사 직원들 집이다. 국가별 퍼레이드를 하는 개·폐막식은 물론 카약·높이뛰기·핸드볼 등 26개 종목 경기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됐다.

 그런포스 올림픽은 한국의 ‘88 서울올림픽’이 그 뿌리다. 창업주 2세인 닐스 듀 옌슨이 동서 화합을 ‘굴렁쇠 소년’으로 상징한 88올림픽에 감동받아 1989년 그런포스 올림픽을 출범시켰다. 이듬해 한국 지사까지 설립했을 정도다.

 그런포스 올림픽은 2년 전에 참가 종목과 경기 규칙을 공지하고 1년 반 전에 선수를 선발한다. 유니폼·체재비·항공료·경기시설 등 모든 비용은 회사 부담이다. 출전 선수에게는 7개월 동안 매달 20만원의 훈련비도 지원한다. 펌프 회사가 왜 ‘올림픽 개최’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걸까.

 신현욱(42) 한국그런포스 대표는 “‘사람 중심’ ‘지속 가능성’ 등 핵심 기업 이념을 우정과 화합의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 임직원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태양열을 이용한 펌프로 성화 대신 성수(聖水)를 뿜어 올리고, 다트·체스·낚시 등의 종목도 넣은 이유다. 각국 문화 행사도 화려하다. 한국은 신 대표가 가수 싸이로 분장해 말춤을 추고, 단체로 난타 공연을 펼쳤다.

 그런포스는 기업의 정체성(Identity)을 창의적인 아이디어(Idea)를 통해 기업 문화로 정립하는 ‘ID(아이덴티티+아이디어) 기업’의 특성이 또렷하다. 이영달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글로벌 선도 기업은 당장 눈앞의 생산 전략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기업 철학과 가치관을 창의적인 문화를 통해 조직이 공유하면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포스 역시 올림픽 도입과 같은 노력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10대 기업’ ‘유럽 품질대상’에 선정됐다. 서울에만도 롯데월드타워 ·GS타워 등 주요 고층 빌딩 90%에 펌프를 공급했다.

 한국의 ‘ID 기업’은 즐거움과 파격을 아이디어와 정체성 확립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정보기술(IT) 전문 로아컨설팅의 직원들은 업무 중에도 사무실 한편의 와인바를 찾는다. ‘아시바(Aseebar)’라고 써놓은 간판에는 입에서 욕이 나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을 때 와인을 마시면서 기분을 풀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매달 와인을 스무 병씩 다시 채워놓을 정도로 이용이 활발하다. 온라인 콘텐트 마케팅 기업인 옐로스토리는 사내 카페에 1200권 규모의 만화방을 차려놓았다. 분기마다 카페는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클럽으로도 변신한다. 종합 IT 기업인 더존비즈온은 아예 사옥을 강원도 춘천시 에 ‘강촌 캠퍼스’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헬스트레이너가 상주하는 체육관에 당구장 ·골프연습장, 주말에 가족과 함께하는 숙박시설까지 종합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방불케 한다.

 IT 기업들이 기업 가치관과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ID 기업’으로 변화하는 선봉에 선 셈이다. 성상현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식 기반 사업으로 인적 자원이 성장의 핵심인 IT 기업은 조직의 유연성과 창의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시계추 근무’ 대신, 필요에 따라 장소를 바꾸며 늘였다 줄였다 하는 ‘요요형 근무’도 여러 곳에서 시도하고 있다. 롯데닷컴은 오전 10시에 출근하는 ‘느린데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빠른데이’ 등을 정해놓고 팀 전원이 사진 등으로 인증하면 회식비를 지원한다.

 사내 조직 간, 업무 간 장벽도 무너지고 있다. 네이버는 레고를 조립하듯 수시로 사업팀을 꾸려서 조직을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금요일에 짐을 싸면 월요일부터 바로 업무가 가능하도록 지원센터를 둘 정도다. 대홍기획은 영역과 매체 제한 없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OCS(Open Creative Solution)’팀을 운영한다. 채희선 숭실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는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소통이 활발해지면 업무의 정확성과 속도가 급속도로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구희령 기자 hea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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