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도 홀린 ‘컬처 쇼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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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부분이 솥 걸던 부뚜막이군요. 그럴듯하네.”

 지난 21일 오후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을 찾은 20여 명이 이곳저곳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 터가 나왔다는 전날 뉴스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학자들과 일반인이 모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한 곳인 이 현장에는 이날 하루에만 100여 명이 찾아와 출토된 철제 솥과 항아리 등을 살펴봤다. 한적한 동네였던 이곳은 세계유산 등재 이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뜻밖이었다. 발굴 현장에서 흔히 보던 가림막이 없었다.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가림막을 치운 건 우리 발굴 수준이 향상됐다는 자신감과 함께 더 세심하게 발굴하겠다는 책임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해문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팀장은 “발굴 과정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최근 흐름을 어떻게 관광과 결합시켜 고급 문화 콘텐트로 만들어 가느냐가 숙제”라고 말했다.

 발굴 현장을 찾아서 보고 음미하며 가슴에 담는 일도 일종의 쇼핑이다. ‘컬처 쇼핑’, 요즘 문화시장을 이끄는 대표 상품의 하나다. 의식주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장소와 유물이 문화의 붓질과 재해석에 힘입어 기존 한류와 다른 경지를 원하는 컬처 쇼핑객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관장 정미숙)은 옛 가구와 의식주 유물을 활용해 차별화를 시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미 해외 명사들의 방한 코스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미국 배우 브래드 피트(사진),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등이 다녀갔다. 2013년 아들과 함께 한 시간 예정으로 왔던 브래드 피트는 ‘어메이징’을 외치며 5시간을 머물 정도였다.

‘미적 극치’와 ‘고급화’를 컬처 쇼핑의 핵심으로 꼽은 정 관장이 또 몇 년째 공을 들이고 있는 문화유산은 서원(書院)과 향교(鄕校)다.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교육기관이자 한국 정신문화의 근원인 서원과 향교는 현재 전국에 1000여 곳이 남아 있다. 1000개의 잠재적인 박물관과 도서관이 놀고 있는 셈이다. 서원의 툇마루 앉은뱅이책상에서 고전을 되새기고, 빗자루질 잘된 마당을 거닐며 수백 년 역사가 퇴적된 공간을 음미하는 ‘서원 스테이(stay)’는 어떨까. 시각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통문화의 현대적 부활이란 시각으로 구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문화재청이 궁궐과 더불어 서원·향교 활용 방안을 고민 중이다. 정 관장도 그 해답을 실험하고 있다. 이르면 10월께 경북 경주시 옥산서원을 1호 서원문화재 활용 모델로 선보일 예정이다.

정미숙 관장은 “조선의 선비정신을 바탕에 깔고 인문학 교육을 결합한 단기체험 코스나 ‘서원 스테이’를 개발하되 제대로 아름답게 복원하고 고급화하면 잠재력이 무궁한 문화자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홍규 쇳대박물관장과 서울 이화동 주민협의회가 지난 5년 동안 가꿔 온 ‘이화동 마을박물관’도 주목된다. 쇠락해 가던 도심 동네에 문화를 덧입혀 남녀노소 누구나 찾아오는 컬처 쇼핑의 보금자리로 탈바꿈시켰다. 좁고 긴 골목, 오래된 석축, 근대 문화유산 가옥이 살아 있는 이화동에 주민이 주인이 되는 마을박물관과 공방 20여 개를 일구고 이 지역다움과 자연을 접목시켰다. 최 관장은 “세월이 작품이 되어 마을인생 2막이 펼쳐지니 주민들만 다니던 이화동에 평일 1000명, 주말이면 5000여 명의 구경꾼이 찾아온다”며 “달동네 골목길에 다시 심장을 뛰게 한 문화의 힘을 느껴 보시라”고 말했다.

익산(전북)=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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