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자의 책 이야기] 루쉬디와 타리크 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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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전후로 이슬람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부쩍 많아졌다. 대화시 내가 적지 않게 놀란 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그랬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에 이미 다윈의 진화론이 나와 있더라." "이슬람은 기독교에 비해 외려 관용적이다." 이런 분들께 은근히 살만 루쉬디의 '악마의 시'를 꺼내본다. 바로크적 언어유희에 취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꽤 재미있었다고 추켜 세운다.

하지만 두 개의 태도는 명백히 모순적이다. 우리들의 사회학적, 문화적 감수성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9.11 이후 이슬람 서적들이 봇물 쏟아지듯 나왔다. 심지어 이븐 할둔의'역사서설'과 같은 고전도,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학적, 정치학적 맥락 속에서 이슬람 문명을 해석하는 질문이 빠져있다는 느낌이다. 이슬람권의 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은 분명 뛰어난 사회학적 저작이다.

하지만 여전히 신앙의 틀 속에서 사회학적 지식을 생산한다. 이 점이 종교와 지식,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킨 마키아벨리와 다른 점이다. 호교론의 입장에서 씌어진 저작들에 식상했던 내 머리를 맑게 만들어준 책이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이었다.

통상 그에겐 트로츠키주의자란 딱지가 붙는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볼테르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 그는 이슬람 내부의 문제를 역사주의적으로 해석하며, 이슬람 문명을 비껴갔던 계몽주의 혁명을 역설한다.

'예언자'를 마훈드란 사기꾼으로, 12명의 부인을 창녀로, 코란을 '악마의 시'라고 묘사한 루쉬디(만약 기독교 국가에서 예수, 성모 마리아와 성경을 그렇게 묘사할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을까? 그점에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루쉬디는 20세기 말 증오문학의 재건자임에 틀림없다)와 달리 그는 '역사적 모하메드'를 그린다. 그런 후에 이슬람 제국의 역사를, 최근 1백년간 제국주의와의 싸움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역사적 예수'를 불경시하는 복음주의 신앙인들처럼, 코란을 계시로 읽는 무슬림들도 이 책을 불온시할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사회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외려 이슬람 종교개혁을 말한다.

이슬람 사회가 당면한 개혁은 서구 기독교 사회가 성취한 엄격한 정교분리, 성직자 집단의 해체, 코란을 해석할 권리의 획득이라는 것이다. 후세인과 부시의 '근본주의 충돌'을 막는 길은 이슬람 내부의 계몽주의 혁명으로 근대성과 화해하는 길이라 주장한다. 편식이 강한 우리 독서계에 해독제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이성형<정치학 박사>

신설 칼럼 '네남자의 책 이야기'는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서동욱(시인.철학박사)정재승(물리학 박사)이성형(정치학 박사)등 젊은 필자 네명이 교대로 6개월간 집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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