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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추억

"항상 통일 생각하되 통일을 말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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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 문제 대기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에곤 바와의 첫 대면에서 그를 “독일의 키신저”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책의 구상력과 비전에서는 바와 키신저가 동급일지 몰라도 협상전략가로는 키신저가 바를 못 따른다. 바를 생각하면 처칠의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처음에 공상력을 갖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해내는 경우는 없다. 먼저 공상력을 가진 다음에 그걸 실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바의 구상력과 판타지의 용량은 참으로 크다. 그는 빌리 브란트 정부의 총리실 전략기획국장 시절 부하들에게 항상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 ”고 독려했다.

 내가 그를 인터뷰한 것은 지난해 11월 12일, 베를린장벽 붕괴 25주년을 맞아 베를린의 공기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던 날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시내 사회민주당 당사 4층의 넓은 사무실에서 만난 바에게서는 흥분의 기색 같은 것은 없었다. 장기적인 비전과 탁월한 구상력으로 베를린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만든 그에게 25년 전의 장벽 붕괴는 역사필연적인 비정상의 정상화일 것이다. 그날 그는 92세의 고령이었지만 9개월 뒤 세상을 떠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는 분단된 베를린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몇 개의 신문을 거쳐 미군 점령지역의 라디오 RIAS의 기자, 해설위원, 해설주간을 지냈다. 그의 라디오 해설을 애청하던 브란트는 1960년 그를 베를린 시정부 보도국장으로 영입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독일의 미래와 관련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바가 없었으면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우리가 아는 그런 모양으로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고 통일로 가는 고속도로도 그렇게는 깔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12일 필자와 인터뷰 중인 바. 그는 지난 19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중앙포토]

 동방정책을 상징하는 “접근에 의한 변화”라는 것도 브란트가 집권(69년)하기 6년 전인 63년 바이에른의 투칭에 있는 개신교 아카데미 강연에서 바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바의 통찰은 통일은 긴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실현된다, 변화는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61년 베를린장벽의 구축을 현장에서 목격한 바는 그 누구도 베를린장벽을 제거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세웠다. 장벽을 제거하지 못할 바에는 작은 통행의 구멍이라도 열어 베를린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유럽대륙 한복판의 ‘외딴섬’에 산다고 불안해하는 서베를린 시민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자고 결심했다. 그는 베를린 시정부 보도국장의 몸으로 동베를린시 당국자와 수차례에 걸친 담판을 해 63년 12월 유명한 ‘통행증 협정’을 체결한다. 그 결과 1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들이 크리스마스 때 동베를린의 가족을 방문했다. 동베를린 정부가 예상한 3만 명의 40배 되는 숫자였다. 바와의 인터뷰에서 ‘접근을 통한 변화’의 사례를 물었더니 “베를린 통행증 협정”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큰 소리보다 작은 걸음”을 강조했다. 그것은 소량의 독극물을 조금씩 서서히 써서 체질을 바꾸는 호메오파티 요법이었다.

 69년 빌리 브란트가 사민(SPD)/자민(FDP) 소연정을 구성해 총리가 되자 바는 총리실 정책기획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선(先) 통일-후(後) 긴장완화’라는 아데나워의 정책을 ‘선 긴장완화-후 통일’로 뒤집어, 오래 구상해 온 유럽 전체의 긴장완화 안에서의 독일 통일 정책을 정열적으로 추진했다. 브란트는 그의 충성심, 애국심, 구상력, 상상력, 협상전술, 전략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둘의 관계는 이름(First name)을 부르는 친구로 발전했다.

 독일 통일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고 확신한 그는 모스크바 제일주의자, 통일의 배신자라는 비난과 미·영·프의 견제를 무릅쓰고 70년 소련 외상 크로미코와의 세 차례 50시간에 걸친 협상으로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폴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해 폴란드의 서부 국경선으로 오데르-나이세를 인정했다.

 동독과는 72년 12월 기본조약을 체결해 상대와 평화공존하는 협조적 생존 방식인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실현했다. 바의 정책은 현상을 인정해 현상을 변경한다는 패러독스로 보이지만, 그것은 바의 독특한 역사변증법이었다. 그는 합병에 의한 통일은 정책이 아니라 기적대망론으로 배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베를린을 방문하면서 바 대신 헬무트 콜 통일 총리의 꼭두각시로 90년 동독 과도정부를 이끈 로타어 데메지에르만 만난 것은 독일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였다. 박 대통령이 그를 만났다면 이런 말을 듣지 않았을까. “통일은 항상 생각한다. 그러나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김영희 국제 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