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가족] "아들아 아빠 쓸만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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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서라 노팀장

남자 나이 마흔다섯. 이제 와 새삼 청춘에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가족들 앞에선 언제까지나 '수퍼맨'이고 싶습니다. 기자 생활 18년에 산전 수전 다 겪은 노팀장이지만 그 속내야 어디 다를 리 있겠습니까.

오늘은 평소 아빠의 늦은 귀가에 입이 나와 있던 둘째 아들 기석(13)이와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 경주를 벌여 볼 참입니다. 언제 타 본 적 있냐고요? 아뇨,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서 30년 전에 얼음을 지쳐본 게 전부랍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3년전부터 인라인을 타왔다네요.

이 무모한 도전을 돕기 위해 인라인 스케이트 전문 강사 배현나(26.여)씨가 출동했습니다. 경력 6년에 각종 대회 우승을 휩쓴 실력이지만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제자를 반나절 만에 '대회'에 출전시켜야 한다는 말에 은근히 부담을 느끼는 눈칩니다.

저런, 저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노팀장이 한쪽 발에만 스케이트를 신고 절룩대며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스케이트 신는 법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젠 담배까지 꺼내 무네요. 이거, 수강생 자세 안 돼 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아들과 경주는 커녕 스케이트를 신고 똑바로 일어설 수나 있을까요.

*** 달려라 노팀장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제법 진도가 빠릅니다. 쉽게 일어선 것은 물론 기본 자세도 금방 배우는군요. 어? 자세가 영 불안한 아주머니 두 분이 노팀장을 커닝하며 따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팀장, 눈치도 빠르시지. 표정에 흐뭇함이 묻어 나옵니다. 기자가 슬쩍 아주머니들께 다가갔습니다.

"아주머니, 저 아저씨 자세 어때요?"

"폼이 참 안정적이네요. 복장도 어울리고…. 저 분 보니까 나이가 별 거 아닌거 같아요. 50대는 돼 보이는데 정말 잘 타네요."

노팀장에게는 앞부분만 말해주어야겠습니다. '50대' 소리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강습 시작 두 시간 뒤. 기본 자세와 주행.회전법을 배웠습니다. 아직 멈추는 것이 서툴긴 해도 이 정도 속도면 아들과 붙어 볼 만합니다. 앗! 기자의 시야에서 노팀장이 사라졌습니다. 어디 간 걸까요.

"선생님, 저희 팀장 어디 갔어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저 뒤쪽에서 동네 아줌마들 자세 가르치고 있어요."

이런, 걸음마 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을 가르치다니요. 노팀장, 제발 수업에 열중하세요.

아빠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기석이에게 물었습니다.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고요.

"에이, 당연히 제가 이기죠."

부전자전이라더니. 인라인은 몰라도 자신감 대결을 붙이면 막상막하일 것 같습니다. 화제를 바꿨습니다.

"기석아, 아빠랑 같이 마지막으로 놀아본 게 언제야?"

"…."

기억이 안나나 봅니다. 최근 1년 동안엔 확실히 없었다네요. 아빠의 귀가가 보통 밤 12시를 넘기다 보니 시간이 없다는군요.

"기석아, 그럼 아빠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짜리 아빠야?"

"음, 80점요."

"왜? 늦게 오고 놀아주지도 않는다며. 점수가 너무 후하네."

"그래도 우리 아빠잖아요."

역시 아들은 아빠 편이군요. 저 멀리서 연습 중인 노팀장, 흐뭇하겠어요.

*** 사랑한다 아들아

강습 네시간 뒤. 드디어 아빠와 아들의 50m 인라인 경주가 시작됩니다. 노팀장을 지도한 배현나씨에게 오늘의 경기 결과 예상을 부탁했습니다.

"아무래도 경력이 있는 아들이 유리하겠지요. 하지만 훌륭한 강사에게 배운 아빠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그새 선생님마저 제자의 '과도한 자신감'에 전염됐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양 선수 출발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노팀장이 쭉쭉 앞서 나옵니다. 앞섭니다.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기석 선수 아빠를 제쳤습니다.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군요. 경력 3년이 하루 배운 초보자에게 질 순 없다는 생각이겠지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네, 골인~ 골인입니다.

누가 이겼냐고요? 에이,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그간 아들에게 무심했던 아빠가 큰 맘 먹고 하루 동안 아들과의 이벤트를 마련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결과가 궁금하시다고요? e-메일 주세요. 제가 살짝 알려드릴게요.

김선하 기자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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