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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의 요정? 120분의 여신! 전지현이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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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암살’ 전지현]15초의 요정? 120분의 여신! 전지현이니까
연기력 위에 매력, 그녀만의 스타성

관객 90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흥행 중인 ‘암살’(7월 22일 개봉, 최동훈 감독)의 히로인은 단연 전지현이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은 배우 전지현, 아니 스타 전지현의 아우라를 토대로 완성된 캐릭터다. 돌이켜보면 전지현은 늘 현실 너머에 있는 듯한 스타였다. 역설적으로 그는 타고난 듯한 스타성 때문에 ‘배우 전지현’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최근 그는 ‘도둑들’(2012, 최동훈 감독)과 ‘암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2014, SBS)에서 스타성을 한껏 활용해 배우로서 재도약했다. 전지현의 매력 자체가 작품의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을 사로잡는 스타 전지현의 매력을 분석하고, 그가 배우로 발돋움하기 위해 보낸 짧지 않은 시간을 살펴본다.

“내 별명이 ‘15초의 요정’이야. 15초짜리 광고만으로 사람들을 확 다 사로잡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15초만 줘 봐.”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한 장면. 배우 천송이(전지현)가 이웃집 남자 도민준(김수현)에게 이렇게 말하며 타이머를 맞춘다. 정확히 15초 뒤, 그녀를 도자기·강아지·나무 취급하던 민준은 송이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전지현이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전지현은 데뷔 직후, 정확히는 프린터 광고에 출연해 캣우먼 수트 같은 옷을 입고 테크노 댄스를 춘 1999년 이후 한 번도 상품성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톱 클래스가 아니라, 클래스 위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의 스타였다. 맑은 피부, 찰랑거리는 머릿결, 우아한 목선, 긴 팔다리, 탄탄한 복근 등 지극히 이상적인 요소로 빚어진 우월한 외모가 가장 큰 무기였다. 여기에 한국인 누구나 좋아할 법한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 함부로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 스타라는 인상도 한몫했다. 하지만 스크린에서는 ‘15초 요정’ 전지현의 위력은 오랜 기간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엽기녀에서 천송이까지, 스타덤의 함정>

‘도둑들’과 ‘별에서 온 그대’까지, 전지현에게 찬사를 가져다준 작품은 대개 최초의 히트작 ‘엽기적인 그녀’(2001, 곽재용 감독)의 이미지를 이리저리 변주한 것이었다. 그가 연기한 엽기녀와 예니콜, 천송이는 모두 조증에 가까운 명랑함과 탈규범적 태도, 강렬한 성(性)적 매력과 푼수기를 동시에 갖춘 캐릭터였다. ‘똘기’에 가까운 자유분방함과 직선적인 언행은 관객에게 통쾌한 해방감을 안겨주었으며, 전지현을 보수적인 성역할에 갇힌 여느 여배우들과 차별화시켰다. 그러한 특수성은 한편으로 전지현의 범용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 그녀는 작품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에게 작품을 맞추는 배우처럼 보였다.

일찍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4인용 식탁’(2003, 이수연 감독)이나 ‘데이지’(2006, 유위강 감독),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정윤철 감독) 등은 오히려 전지현의 티켓 파워가 특정 장르와 캐릭터에 한해서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방증으로 남았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된 매니지먼트의 신비주의 전략은 배우로서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 그리고 ‘블러드’(2009, 크리스 나흔 감독)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 웨인 왕 감독) 등 국제 합작 프로젝트의 실패는 그녀가 작품의 내실보다 규모에 연연하는 스타라는 인식을 남겼다.

반전은 ‘도둑들’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주류와 동떨어져 독자적인 브랜드로 활동하던 전지현이, 비록 쟁쟁한 배우들로 구성되었다곤 하지만 멀티 캐스팅을 수락한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전지현이 그 쟁쟁한 배우들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특유의 뻔뻔하리만큼 여유 있는 태도, 변화무쌍한 표정, 정확한 타이밍의 코미디로 극에 활력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압도적인 미모로 매 순간 관객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연기력 위에 매력’이라는 교훈을 그녀만큼 극적으로 드러낸 배우가 여태껏 한국 영화계에 있었던가.

단숨에 영화계 메인 스트림에 복귀한 전지현은 연달아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간의 과작이 결코 자신의 나태함이나 비겁함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말이다. 그리고 지난해, ‘엽기적인 그녀’ 못지않은 또 한 편의 화제작 ‘별에서 온 그대’가 탄생했다. 주인공 송이는 절대 미모를 가진 안하무인의 톱스타다. 하지만 한편으로 ‘치맥’에 열광하는 털털한 생활인이고, 사랑에 목마른 여자이며, 부당한 오욕에도 쉽게 품위를 잃지 않는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화함으로써, 전지현이라는 배우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는 매 순간 본능적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의 코미디에는 새침한 모습이나 내숭이 섞이지 않는다. 당당한 체격에 아울러 불필요한 잔동작이 거의 없는 그녀의 몸짓은 중성적인 카리스마에까지 가닿는다.

 

<‘암살’이 매혹적인 이유>

15초의 요정이 아니라 120분의 여신, 미니시리즈의 여왕으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숙제는 캐릭터를 다양화시키는 것이었다. 비련의 여인으로 등장한 ‘베를린’(2013, 류승완 감독)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진지한 전지현’이 극의 중심에 나섰을 때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지만 ‘암살’이 ‘1000만 영화’를 향해 순항하는 지금, 그가 확고한 상수로 거듭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물론 ‘암살’은 최동훈 감독 특유의 밀도 높은 시나리오와 탄탄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전지현이 없었다면 ‘암살’이 그토록 매혹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을까.

한국 서사극에서 사랑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여성성이 아니라 리더십과 위력을 이용해 싸우는 여성 캐릭터는 흔치 않다. 간혹 그런 캐릭터가 있더라도 상투적인 여전사 이미지에 매몰되거나 남자 배우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곤 했다. 올해만 해도 개인적 복수를 위해 난세의 싸움판에 뛰어들었으나, 무기라곤 색기 밖에 없는 가련한 여자들이 두엇 스크린을 스쳐갔다. 지난해 관객 860만 명을 동원한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이석훈 감독, 이하 ‘해적’)에서 손예진이 희망을 보여주긴 했다. 그러나 ‘해적’은 애초 여배우의 카리스마보다 앙상블에 의지하도록 설계된 작품이었다. 하여 ‘암살’은 사실상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낸 의미 깊은 작품이라 봐도 좋을 것 같다. 제작비 180억에 달하는 대작을 한복판에서 이끌어갈 여배우로 전지현이 낙점된 것은 의외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전지현은 ‘적군 네 명을 잡는 데 총알 딱 네 발’을 쏜 그의 캐릭터, 옥윤만큼이나 정확한 저격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국 영화계는 드디어 액션의 컷이 나뉠 때마다 끙끙거리고 인상을 쓰는 대신 5㎏짜리 총을 들고 산을 타거나 지붕을 뛰어다니면서도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여배우를 만났다. 풀숏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그의 신체 조건은 남녀 모두가 존경을 담아 ‘대장’이라 부르는 옥윤의 카리스마에 설득력을 더했고, 액션신의 스펙터클을 증폭시켰다. 작전을 앞둔 옥윤이 아이처럼 순진하게 웃으며 춤을 출 때, 총 맞고 병원에 실려가서 억울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항의 필연성을 이야기할 때, 관객은 소리 없이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사로잡는 15초 요정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전지현은 정교하게 세공된 연기자는 아니다. 미츠코와 옥윤이 만나는 신에서 서로 감정선이 겉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단지 어색한 CG(컴퓨터 그래픽)의 탓만은 아닐 게다. 미츠코는 맥락에 비해 가볍고 과장돼 있으며, 옥윤은 응당 보여야 할 경계심이나 반가움 없이 그저 건조하다. ‘베를린’에서 샤워 부스에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아찔한 긴장감을 자아내던 하정우와 전지현은 이 영화에서 제대로 화학 작용을 내지 못한다. 전지현만의 탓은 아니겠으나, 강인한 전사와 사랑에 빠진 여자를 동시에 표현하는 입체적인 연기가 부족해 보인다. 성대를 억눌러 내는 중저음과 높은 비음이 불균질하게 뒤섞인 독특한 발성은, 젊은 배우의 상투적인 연극 톤보다 세련된 것이지만, 여전히 이를 아슬아슬하게 느끼며 받아들이는 관객이 적잖다. 그러나 그의 매력은 다시 한 번 사소한 서걱거림을 뒤덮어 버리고, 영화 전체의 인상을 전지현이란 이름 하나로 갈음하게 만들었다.

   

<그 어떤 여배우도 가 본 적 없는 길>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알파걸 세대의 아이콘이자 흥행 퀸으로 등극했던 전지현. 그는 ‘암살’을 통해 또 한 번 독보적인 여성상을 창조하며 여배우 주연 영화의 흥행 기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당대 최고의 스타성을 가진 상징적인 배우가 좋은 연출과 작품을 만났을 때 빚어내는 시너지를 지금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들이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 전지현은 엽기녀 이미지와 함께 긴 생머리와 미니 스커트도 버렸지만, 화려한 동료 배우와 스펙터클의 지원을 받았다. ‘암살’같이 그의 스타성에 걸맞은 규모와 캐릭터를 갖춘 영화가 계속 만들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암살’의 성공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가 진일보하고 여배우의 활동폭이 넓어진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으나, 지금으로선 그의 미래를 섣불리 점치기가 쉽지 않다. 전지현은 ‘암살’ 개봉 전 magazine M과의 인터뷰에서 “요즘에는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죽기 전에 언제 또 이런 역할을 맡을까 싶다”고 밝혔다. 그의 말을 기우로 돌릴 변화의 열쇠는, 지금으로선 다른 누구도 아닌 전지현 자신이 쥐고 있다. 그는 아직 그 어떤 여배우도 가 본 적 없는 길에 도달해 있다.

글=이숙명 영화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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