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붉은풍금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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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정록(1964~ ), '붉은풍금새'

누나하고 부르면

내 가슴속에

붉은풍금새 한 마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풍금 뚜껑을 열자

건반이 하나도 없다

칠흙의 나무궤짝에

나물 뜯던 부엌칼과

생솔 아궁이와 동화전자주식회사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

그 붉은 눈알이 떠 있다

언 걸레를 비틀던

곱은 손가락이

무너진 건반으로 쌓여있다

누나하고 부르면

내 가슴속,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에서

붉은 새 한 마리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아저씨. 옛 생각이 나세요. 비어있으나 꽉 찬, 정겨운. 저는 파란 매미예요. 한강 옆에 살다가 작년부턴 신도시에 살아요. 우리 누난 흰 가죽 자켓 입고 휘날리다가 어제부턴 보르헤스를 읽어요. 아저씨! 추억의 배가 다 완성되면 푸르른 노래 한 곡 불러드릴게요.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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