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韓·美 방위비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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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미국이 "서울 방위 강화를 위해 1백10억달러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방위비 분담(分擔)문제로 한국과 옥신각신해온 게 미국이다. 그러던 미국이 갑자기 백기사로 돌변하여 선심공세를 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전력증강'이라는 추상적 발표 수준을 넘어 1백10억달러라는 숫자까지 명료하게 밝힌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해답은 '매칭 펀드(matching fund)'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매칭 펀드' 사회다. 누군가 학교, 병원, 박물관 등 공익사업을 위해 개인 돈을 내놓으면 해당 공익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연방 또는 지방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matching)' 규모의 돈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한 독지가가 주립대학에 1백만달러를 기부하면 주정부가 똑같은 금액의 '매칭 펀드 1백만달러'를 내놓는 게 상례다.

이런 미국적 정서와 시각에서 보면 "서울 방위를 위해 1백10억달러를 내놓겠다"는 미국의 발표는 "한국도 매칭 펀드 1백10억달러를 내놓으라"는 무언(無言)의 청구서나 마찬가지다.

한국에만 1백1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반미(反美)감정을 자극했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미 이같은 '매칭 펀드 딜(deal)'에 합의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은 "국방비를 현 국내총생산(GDP)의 2.7% 수준에서 3.5%대로 늘려야 한다"며 화답(和答)한 상태다. 미국이 북을 치니까 한국이 장구 치는 격이다.

문제는 우리의 능력과 한계가 이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구촌 최대부국 미국에겐 1백10억 달러가 큰 돈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큰 돈이다.

자동차 한대 수출해서 남는 돈이 1천달러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의 추산이고 보면 1백10억달러는 자동차 1천만대 이상을 수출해야 모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햇볕정책은 군비 축소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적지 않은 '평화비용'을 지출해왔다. 석유, 비료, 쌀, 원전(原電) 등은 물론,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넘어간 5억달러도 일종의 평화비용이기는 마찬가지다.

평화비용을 지출하면서 군비는 늘려야 한다면 햇볕정책은 '겹 곱사등' 정책이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승계했다. 따라서 盧대통령은 평화비용 지출에도 불구하고 군비를 늘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번 군비증액계획은 군 디지털(digital)화를 위한 것이지 햇볕정책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패트리엇 미사일, 아파치 헬기 등으로 1백10억달러를 채울 심산인 모양이다.

이들 무기의 성능을 혹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독과점 품목이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표를 붙여놔도 할 말이 없다.

결국 미국이 내놓겠다는 1백10억달러는 '입금확인이 불가능한' 속 빈 강정일 수 있다. 이같은 '미국 마음대로 시장'에선 바가지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속된 말로 미국의 '따따블' 장사에 놀아날 수 있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에 무슨 돈이 있느냐"며 밀고 당길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 가서 오버 좀 했다"는 盧대통령의 발언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한국'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신뢰감이 없는 이런 외교방식은 국민적 비용으로 돌아온다. '혈맹관계'가 아닌 '상업적(business)관계'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정책이 얼마나 많은 국민적 부담으로 되돌아오는지를 '매칭펀드 1백10억달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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