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의 세계] 1. 아파트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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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분자가 열쇠다. 몸속 분자를 잘 들여다 보면 병에 걸릴지를 알 수 있고, 분자의 활동을 조절하면 제품의 생산 효율을 수천, 수만배로 높일 수 있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분자 하나에서 정보를 읽어내려 하고, 분자들의 행동을 장기판의 말 다루듯 마음대로 조절하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자의 세계에서 과학자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시리즈로 알아본다.

황금보다 더 비싼 백금은 매우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떠돌아다니는 여러 가지 분자들을 끌어당겨서는 표면에 붙잡고 있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백금 표면에 잡힌 분자들은 공기 중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때보다는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기 때문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변하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일어난다. 이처럼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반응이 잘 일어나게 해주는 물질을 '촉매'라 한다.

앞서 백금은 "분자들을 끌어당겨 '표면'에 붙잡고 있으려 한다"고 했다. 이 과정은 모든 촉매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촉매는 가능한 표면의 면적, 즉 표면적이 넓을수록 기능을 잘 한다.

그런데 똑같은 양의 촉매 물질을 갖고도 표면적은 훨씬 넓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잘게 쪼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금 1㎏이 있다고 하자.이것을 둥근 덩어리 하나로 만들면 지름이 약 4.5㎝가 된다. 하지만 같은 1㎏을 지름 1㎜인 백금 알갱이들로 만들면, 그 표면적의 합은 하나의 덩어리 일 때에 비해 약 45배가 된다. 지름을 0.001㎜로 줄이면 표면적은 4만5천배, 그리고 요즘 많이 얘기하는 1나노m(0.000001㎜)면 무려 4천5백만배가 된다.

이렇게 엄청나게 표면적이 넓어지게 되므로, 같은 무게의 촉매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나노m 크기로 만들게 되면 반응도 훨씬 잘 일어난다. 이것이 '나노 물질'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촉매 물질을 나노 크기로 작게 만들면,작은 물방울이 서로 붙어서 커지듯 큰 덩어리로 뭉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표면적이 줄어든다.

해법은 화학자들이 찾아냈다. 맥주 박스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칸마다 촉매 알갱이가 따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칸의 크기가 나노 정도면 당연히 칸 속에 들어간 촉매도 그 이상 커질 수 없다.

이렇게 맥주 박스 같은 역할을 하는 물질로 많이 쓰이는 게 '제올라이트'다. 제올라이트는 곳곳에 지름 1나노m 정도의 구멍이 있고, 여기에 백금 나노 알갱이와 같은 촉매 물질이 들어 갈 수 있다. 나노 크기 촉매 물질들이 들어차 사는 아파트쯤 되는 셈이다.

때로는 반응을 일으키는 분자가 단백질처럼 큰 것이어서 1나노m 크기의 구멍 속에 있는 촉매에는 들러붙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구멍 크기가 제올라이트 보다 훨씬 더 큰 물질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학자들은 물질 내부의 구멍 크기를 조절하는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주목받는 것이 '계면활성제 분자'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분자들을 물 속에 넣으면, 온도 등 여건에 따라 10~1백나노m까지 다양한 크기와 모양으로 뭉친다.

이런 분자들의 '심'이 박혀 있는 물질을 만들고, 나중에 심을 없애면 구조물 안에 원하는 모양과 크기를 가진 구멍들이 생기도록 할 수 있다.형태도 꼭 공뿐만 아니라 원기둥, 얇은 판, 심지어 추상 조각처럼 복잡한 모양까지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나노구조물은 '분자 체'로도 쓰일 수 있다. 즉 분자들을 체로 치듯 해서 원하는 종류의 분자만 골라내는 것이다. 이 기술은 현재 공기로부터 질소와 산소를 분리하는데 실제로 쓰이고 있다.

유룡 교수 KAIST 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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