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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69% “이념·지역·세대보다 빈부 갈등 더 심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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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10면

일러스트 강일구

A씨(35)는 9년차 대기업 직원이다. 제때 취업했고 입사 3년 만에 결혼해 두 딸도 뒀다. 부인도 대기업에 다녀 소득이 적지 않지만 최근 다단계 부업을 시작했다. “4000만원 대출받아서 2억원짜리 아파트 전세 사는데, 재계약하려면 수천만원 올려줘야 하잖아요. 애들 교육비도 점점 더 들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중앙SUNDAY 공동기획] 대한민국 불평등 리포트 <중>

 가정형편 탓에 대출받아 대학을 다닌 그는 취업도 못하는 후배들을 보면 이만큼이라도 사는 게 어디냐고도 생각한다. 그동안 학자금도 갚고, 가정도 꾸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형편 좋은 친구들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부모가 한몫씩 챙겨준 친구들은 월급이 적어도 여유가 있어요. 부모가 집 장만해 준 친구하고 갈수록 격차가 벌어질 텐데, 갑갑하죠.”

 대출금 갚기에 급급한 그는 장기 계획은 세우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직장 번듯하고 맞벌이니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세대는 월급 모아 집 사고 집값 올라 재산도 불렸잖아요. 이젠 불가능해요. 월급은 안 오르는데 집값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뜻하는 신조어)’이니까요.”

 A씨는 부(富)의 격차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대물림까지 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A씨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체감하고 있다. 빈부 격차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갈등 요소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35~39세, 빈부 갈등 심각하게 인식
중앙SUNDAY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공동 기획한 ‘국민인식조사’는 한국 사회의 갈등과 신뢰를 진단했다. 설문은 부자와 가난한 자, 20~30대와 50~60대, 영남인과 호남인, 진보와 보수,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수도권과 지방, 남자와 여자 등 집단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 결과 응답자 68.5%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이 심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64.8%), 영호남의 지역 갈등(51.5%), 20~30대와 50~60대의 세대 갈등(48.1%)이 그 뒤를 이었다. 남녀 갈등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7.5%로 가장 낮았다.

 1점(갈등 수준이 매우 낮다)~5점(갈등 수준이 매우 높다)의 척도로 점수를 매기도록 한 결과에서도 빈부 갈등은 이념 갈등과 함께 3.81점으로 가장 높았다. 지역 갈등이 3.49점, 고학력자·저학력자 갈등이 3.45점, 세대 갈등이 3.43점이었다.

40대 초반 선 빈부 갈등 심각하게 안 봐
빈부 갈등과 관련해선 특히 연령별 인식차가 두드러졌다. 대체로 연령이 낮을수록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건 40대 초반과 30대 후반의 극명한 인식 차이다. 5세 단위로 연령을 나눈 조사에서 35~39세는 3.91점, 40~44세는 3.70점을 매겼다. 전 연령대 중 30대 후반은 가장 심각하게, 40대 초반은 가장 심각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1970년대에 태어난 또래 집단인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의 인식이 엇갈리는 데 대해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즈음 벌어진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동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행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실질임금 인상률이 매우 낮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또 부동산이 급등하는 등 격변을 지나오면서 전통적인 가정 경제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지역별로는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인천·전북·전남·경남을 제외한 13곳에서 빈부 갈등을 제일 심각하게 인식했다. 앞선 네 곳은 진보·보수의 이념 갈등을 더 많이 꼽았다. 다만 전북은 빈부 갈등(4.17점)이 이념 갈등(4.26점)보다 낮았지만 점수 자체로는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전북은 한국 사회를 가장 불평등하다고 평가했고, 특히 소득·금융재산의 평등 면에서 아주 박하게 평가했다. 전북의 결과가 보여주는 불평등과 빈부 갈등 인식의 상관관계에 대해 금 교수는 “소득 불평등은 교육·주거·여가는 물론 다음 세대로도 전이된다”며 “그런 현상이 이어지면 개인의 노력과 사회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아져 사회불안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빈부 갈등을 한국의 주요 갈등으로 보는 시각은 다른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에서 발표한 ‘2014년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조사’에서 조사 대상의 88.9%가 ‘부유층과 빈민층 간 갈등’을 가장 심각하게 봤다. 한 해 전 같은 조사에선 ‘진보·보수 간 이념 갈등(89.3%)‘이 1위로 꼽혔었다. 1년 만에 순위가 바뀐 것이다.

국회의원, 처음 만나는 사람보다 못 믿어
이런 연구들은 갈등을 관리·해결하는 데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 자본으로서의 신뢰 축적이 사회 통합의 핵심 요소라는 분석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사에서는 37%가 우리 사회를 ‘믿을 수 있다’고 답했다. ‘믿을 수 없다(31.6%)’보다 약간 높은 수치다. 신뢰에 대해서도 연령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젊은층일수록 우리 사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60대 이상 응답자의 25.1%가, 20대는 39.3%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설문은 내부집단(가족·친구·이웃 등)과 외부집단(다른 나라 사람,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나눠 집단에 대한 신뢰도도 조사했다. 가족에 대한 신뢰가 93.9%로 가장 높았고, 친구(82.0%)·직장동료(52.4%) 순이었다. 반면 처음 만나는 사람(10.2%)과 다른 나라 사람(8.9%) 등 외부집단에 대한 신뢰는 사적(私的) 관계에 비해 낮았다.

 신뢰와 관련한 흥미로운 결과는 대통령·중앙행정기관·청와대·사법부·입법부·국회의원 등 정부기관에 대한 조사에서 나왔다. 대통령(30.6%)·중앙행정기관(22.5%)·청와대(22.5%) 순으로 신뢰도가 떨어졌다. 특히 국회의원(5.2%)은 꼴찌였고, 입법부(8.5%)와 고위 관료(9.1%)도 낙제점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보다도 낮은 신뢰도다. 국민이 정부나 공공영역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금 교수는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에 대한 분노나 질책의 표현이 신뢰 저평가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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