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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시련이 우리의 신념을 꺾지 않길

중앙일보

입력

도반(道伴)과 현재 번역 중인 일본 서적에 대해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일본에 살던 때가 떠올랐다. 어느 해인가 재일교포 3세인 영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 머릿속을 뒤져봐도 기억에 없다. 다만 영희가 해 주었던 이야기만은 생생하다. 감동적이었고 교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희는 조선인 학교를 나왔다. 영희는 국적이 없었다. 뒤늦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건너 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가족들은 줄곧 국적이 없었다.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다.

영희의 할머니·할아버지는 일본에 강제 징용됐다. 광복을 맞았지만 고향인 경상북도 성주 땅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 됐다. 이후 교토에 살게 되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국적을 취득하라는 압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대부분의 교포들이 남쪽이든 북쪽이든 선택하는 중에도 통일된 나라가 아니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노라며 ‘조선인’ 호패를 끝까지 지니고 계셨다고 한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영희만 한국 유학을 위해 국적 취득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고향이 남쪽이니 남한 국적을 취득하면 될 텐데, 김구 선생을 언급하며 통일 조국을 꿈꾸던 할머니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 모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국적이 없으면 해외는 물론 한국에도 갈 수 없고, 여러 행정 처리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영희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나는 자세히 보게 되었다. 아니 그들의 고통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교포의 삶과 애환,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 일본 산천에 묻혀 있는 이름 모를 조선인들, 한국인과 일본인의 성향. 보면 볼수록 우리의 역사는 일본으로 인한 고통이 가득했다. 얼마 전에는 조계사 뒷길을 지나다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현장을 보게 되었다.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은 조선인이 강제 노동했던 ‘하시마섬(端島·군함도)’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에 바빴다. 사과는커녕 자국의 이익 앞에선 모든 것을 눈감는 사람들, 어지간히도 일본인답다. 광복절이 다가오는데, 기뻐야 할 그날에 어르신들께서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생각해 보면 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같다. 작은 난관에만 부딪쳐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물며 역사적 시련이 주는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자기 안에 담게 마련이고, 그것은 때로 신념과 의지를 무너뜨린다. 내가 영희 할머니에게서 받은 감명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끝까지 가졌기 때문이다. 가족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를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탓에 그분의 무너지지 않은 의지가 놀라울 뿐이다.

나는 인생의 의미가 어느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일상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작은 행위와 생각들이 쌓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더욱 삶의 시련과 고통이 우리의 신념을 바꾸지 않기를 바란다.

원영 스님 metta4u@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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