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술관으로 들어온 공항 … 나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미수취 수하물’(2005) 앞의 마이클 엘름그린(왼쪽)과 잉가 드라그셋. 뒤의 휠체어 설치는 ‘생일’이라는 제목으로 쓸쓸함을 더한다. 두 사람의 국내 첫 전시로, 삼성미술관 플라토를 공항처럼 바꿨다. [사진가 김현수]

“공항은 통과하기 위해, 그것도 빨리 통과하기 위해 설계됐다. ‘비장소(non-place)’의 전형이다.”(크리스토퍼 샤버그, 『인문학, 공항을 읽다』)

 도심의 유리 미술관이 가짜 공항이 됐다. 건물 앞에는 은색의 가짜 공중전화 부스가 생겼고, 근처에는 ‘250m 앞에 천 개의 플라토 공항’이라는 녹색 표지판이 섰다. 보일 듯 말 듯한 변화는 전시장으로 이어진다. 전시장 입구에는 검색대가 있고, 그 앞에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닮은 조각이 수하물처럼 비닐 포장돼 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인 셈이다. 23일부터 열리는 북유럽 미술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천 개의 플라토 공항’ 전이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과 ‘지옥의 문’을 상설 전시하는 로댕 갤러리로 99년 문을 연 이곳은 2011년 플라토(고원)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마이클 엘름그린(54·덴마크)과 잉가 드라그셋(46·노르웨이)은 유리건물인 플라토가 공항과 닮았다고 여겼다. 전시 제목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책 『천 개의 고원』에서 따 왔다. 미술관도 공항도 잠시 머무는 곳이며, 심신의 여행을 하며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곳이다.

 “미술가는 여러 개의 집을 갖고 있다. 그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미술관과 공항이다. 둘 사이에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제약이 많은 곳이며, 사람들이 통제된 방식으로 움직인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 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고 엘름그린은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장소의 맥락을 바꿔버리는 데 장기가 있다. 2005년엔 미국 텍사스 사막에 가짜 프라다 플래그숍을 만들었고,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며 ‘여기가 어디지’ 할 때가 예술이 가장 기능을 잘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은 여러 가지를 보고 여러분이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말이다.

 이번에도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상투적 편의시설들이 조금씩 틀어진 채 전시장 곳곳에 놓였다. 행선지를 알리는 전광판에는 카르타고·엘도라도 등 비현실적 지명이 섞여 있다. 화려한 광고판에선 위스키가 쏟아지다가, 쓰레기차가 쓰레기를 확 쏟아내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투명 기부함에는 운동화 한 짝, 부러진 선글라스, 구겨진 담뱃갑 등 무용지물이 들어가 있을 뿐, 비정하다. 수류탄·악어 등 반입금지 물품은 무슨 귀한 보물처럼 희게 칠해 진열장에 고이 모셨다. 23번 게이트로 올라가는 계단은 부서져 있다.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가 좌절감을 준다. 여행 가방 하나는 수하물 벨트에서 끝없이 빙빙 돌고, 커다란 벽시계의 초침은 근근이 움직이지만 시간은 가지 않는다.

비행은 엄청난 속도를 동반하는 일이건만 공항에서의 시간은 멈춰져 있는 듯하다. 기능을 상실한 이곳은 세상의 기만과 소외를 상징하는 걸까. 10월 18일까지. 1577-7595.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