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이제 아무도 ‘웨스트 윙’을 말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노무현 대통령=“의원들도 내기 골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걸 도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총리가 그만둔다고 민심이 좋아지겠습니까.”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해찬 총리는 구하지만 정동영은 버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6년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파문 때 노 대통령과 정 의장이 청와대에서 나눈 대화다. 총리 교체에 부정적인 노 대통령, 지방선거 악재를 빨리 털어내야 하는 정 의장 사이에 계급장을 뗀 격론이 벌어졌다. ‘노무현의 필사’인 윤태영 전 연설기획비서관이 펴낸 책 『바보, 산을 옮기다』의 한 대목. 정 의장이 돌아간 뒤 노 대통령은 “이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

 윤 전 비서관은 ‘국민통합을 향한 노무현의 도전’이 책의 주제라고 했지만 필자에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 자신의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키려는 그의 집념이 더 흥미로웠다. 그는 당 지도부를 만나려 김우식 비서실장의 공관에서 열린 ‘번개 만찬’에 참석했고, 총리공관에서의 당·정·청 수뇌부 11인 회동에도 깜짝 등장했다. “대결적 정치문화를 바꾸려면 야당에 총리직을 넘겨주자”는 그의 설득은 결국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스트라이커는 나까지만, 다음은 ‘단호하되 외유내강형’이 맡아야 한다”며 차기 대통령의 조건을 토론했고, 때론 술에 취해 애창곡 ‘나그네 설움’을 흥얼댔다. 최측근 참모가 쓴 책이니 긍정적 모습이 많이 부각된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그가 성공한 대통령인지’ 평가를 떠나 당 지도부·참모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추구한 모습만은 인상적이었다.

 한때 백악관의 일상을 다룬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이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됐다. 친구처럼 격의 없이 조언과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 대통령과 참모들, 미션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소통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비서진이 대통령과 한 공간에서 일하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하드웨어를 못 바꾸면 일하는 방식이라도 고치자”는 다짐과 시도가 직전 정부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 정부 들어 ‘웨스트 윙’을 말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전임 비서실장 시절 씌워진 ‘불통(不通) 청와대’ 이미지 때문에 국민들의 기대 수준이 낮아진 탓일까. 비선 실세 논란과 거부권 정국을 거치며 소통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웨스트 윙’은커녕 최악의 불통 사례들만 괴담처럼 정치권에 떠돌았다. 유승민 정국이 봉합되고 ‘마당발’ 정무수석이 취임하면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당·정·청은 한 몸”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당 의원들은 조를 짜 청와대에서 밥을 먹게 될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달라질 수 있을까. 언젠가 ‘박근혜 대통령의 필사’ 누군가가 책을 쓰고, 이를 본 국민들이 “내가 큰 오해를 했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가 소통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구나”라며 무릎을 치는 날이 꼭 오기를 기대한다.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