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구슬 목걸이로 엮는 이웃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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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성들여 꿴 구슬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것을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가 알면 기특하다며 제 어깨를 두드려 줄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정이 많으셔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보면 항상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도와주셨죠."

쌍용그룹 창업주인 고(故)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씨의 장녀 김인숙(金仁淑.64)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가 20여년간 수집한 구슬로 만든 목걸이를 불우이웃을 위해 내놓았다.

金교수는 지난 5일부터 오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성곡미술관에서 '구슬 목걸이 이야기'라는 주제로 3백50여점의 구슬목걸이 작품을 전시한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목걸이를 판매해 얻은 수익금을 각막.장기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활동을 펴는 새생명광명회와 인도.티베트에서 직접 데려온 외국학생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그는 "그동안 만든 목걸이가 대략 2천점은 될 듯한데 요즘 집안에 쌓인 구슬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다"고 말했다. 또 남편인 나라기획 조해형 회장도 구슬 작업 때문에 빈번하게 밤을 새우는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金교수는 "이제 제 작품이 어릴적 제가 자랐던 집을 고친 미술관에서 애호가들을 만나 그 분들의 사랑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흐뭇하다"고 말했다.

전시되는 작품들은 그가 1980년대 초반부터 외국에 갈 때마다 골동품상점이나 주말 벼룩시장을 찾아가 구입한 구슬들을 손수 꿰어 만든 것들이다. 멕시코의 일요시장, 인도 봄베이 골동품 시장 등 그가 그동안 구슬을 구하고자 찾아간 나라만도 20여개국이 넘는다.

"외국에서 마음에 드는 구슬을 발견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곤 했어요. 구슬들이 오랜 세월을 숨쉬고 살아온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거든요. 구슬들을 닦은 뒤 초저녁부터 오전 4~5시까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목걸이를 만들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절감했습니다. 색깔.크기.무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슬을 조합하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스타일의 목걸이가 나오더라고요."

金교수는 50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갔을 때 친척 언니가 보여준 구슬 손가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가방에 붙여진 여러 색상의 구슬이 어찌나 예쁘던지 밤잠을 설쳤습니다. 친척집에 찾아가 '구슬 손가방 좀 보여달라'고 조르곤 했죠. 40대에 들어선 후 직접 만든 구슬 목걸이를 차고 싶다고 생각한 게 이렇게 중년의 제 삶을 지배하게 됐네요. 비록 비싸지는 않지만 옷과 잘 어울리고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목걸이가 최고라는 생각입니다."

金교수는 구슬 목걸이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아버지 성곡과 어머니 고(故) 김미희 여사의 교육법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한번도 저에게 무엇을 해라, 말라고 하지 않으셨죠. 오히려 제가 고민을 얘기하면서 '아버지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되물었어요. 그러면서 '아버지 생각에는 니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저를 격려했죠.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를 곧장 일본.미국 등으로 유학보낸 것도 저의 창의성.독립성을 키워주려는 배려 같았어요."

金교수는 한국유권자연맹의 기초발기인으로 참가하고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후원하면서 '한국여성계의 대모(代母)'로 불릴 만큼 여성의 지위 향상에 앞장섰던 어머니를 엄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다섯살 때 한번은 마당에서 넘어졌어요. 무릎에서 피가 나기에 울었더니 대청마루에 서 있던 어머니가 '울지마! 안죽는다. 일어나라'며 오히려 호통을 치는 거예요. 어찌나 어린 마음에 서럽던지…. 부모님은 자식들을 과잉보호하면 안되고 가능하면 일찍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金교수는 아버지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가 71년 당시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야당의 해임건의안이 일부 공화당 의원의 가세로 국회에서 통과된 이른바 '10.2 항명파동'에 휘말려 정계를 떠날 무렵이었다고 회고했다.

63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 재경위원장.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던 성곡은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면서 타의에 의해 정치 일선에서 떠나야 했다.

"아버지는 당시 제가 살던 미국 보스턴으로 날아와 1년 가량 살면서 무척 힘들어했죠. 아침에 일어나 식탁을 보면 아버지가 밤새 혼자서 비운 양주병이 놓여 있었어요. 좀처럼 말씀이 없으시던 분이 취중에 저에게 대뜸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자데이'라고 했어요. 그게 속마음이 아니었을까라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는 "6형제 모두 자신들이 아버지와 가까웠다고 생각했다"며 "아버지가 75년 초 62세의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비.바람을 막아주던 큰 느티나무가 사라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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