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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황현산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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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한용운(1879~1944) ‘님의 침묵’ 중에서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

말의 신비 일깨운 만해의 절정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처음 읽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시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구절이 가슴에 사무쳤다. 귀먹게 하는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눈멀게 하는 빛은 얼마나 찬란할까, 나는 그 빛과 목소리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이 시구의 감동은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첫 번째 구체적인 체험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신비로운 힘에 대한 각성이기도 했다. 그 체험과 각성에 의지하여 나는 문학에서 내 직능을 발견하고 시를 공부했다. 만해는 내가 시를 찾아가는 과정의 모든 고비에서마다 다르면서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시가 우리의 가장 깊은 정조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만해의 목소리는 성실한 애인의 노래였으며, 시가 현실에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만해의 ‘님’은 그가 꿈꾸던 조국 광복이었으며, 시는 절대적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만해는 구도의 선사였다. 만해는 애인이었을 때 선사였고, 선사일 때 투사였으며, 투사일 때 또다시 애인이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