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48) 장훈 선수 <下>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장훈은 1977년 1월 어머니, 형 부부와 함께 귀국했을 때 기자회견에서 "통산 3천 안타에 도전하겠다"고 야심찬 목표를 밝혔다. 3천 안타는 일본 프로야구 전인미답의 기록이었다. 장훈은 3년 뒤인 80년 5월 27일 롯데 오리온즈 소속으로 한큐 브레이브스와 가진 경기에서 통산 3천 안타를 달성해 약속을 지켰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뛸듯이 기뻤다. '뭔가 기념할 만한 행사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세계 최다홈런 기록을 세웠을 때 모국인 대만의 장제스(蔣介石)총통이 직접 초청해 훈장을 줬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장훈도 훈장을 받게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곧바로 대한체육회 박찬욱 사무국장에게 연락해 훈장 수여를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류를 만들어 체육회에 전달했다. 그러나 며칠 뒤 기각됐다는 연락이 왔다. "아마추어 단체에서 어떻게 프로선수에게 상을 주자고 정부에 건의하느냐.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에서 장훈을 후원하는 양회장이라는 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과 같은 고향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래서 양회장에게 박종규 회장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를 마련해보자고 제의했다. 나는 "장훈은 재일동포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이런 애국자에게 규정 때문에 상을 주지 못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이튿날 박종규 회장을 만난 나는 오 사다하루의 예를 들며 장훈이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 대만 출신 오 사다하루는 일본인으로 귀화했지만, 장훈은 귀화도 하지 않고 한국인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朴회장은 그 자리에서 "문교부 장관과 총무처 장관에게 연락해 바로 훈장을 받을 수 있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6월 하순 장훈에게 훈장을 주기로 최종 결정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훈장을 주는 날짜였다. 나는 문교부 체육국을 찾아가 "시즌이 끝난 뒤 훈장을 주면 의미가 퇴색합니다. 장훈이 속한 퍼시픽리그는 7월 하순 전기리그를 끝내고 닷새의 휴식 기간을 갖습니다. 이때 수여식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체육국에서는 "대통령의 일정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조정할 수 없으니 3개월 여유를 두고 다시 신청하라"며 거절했다.

나는 일간스포츠 조동표 기자를 통해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이원홍 청와대 수석에게 장훈의 훈장 수여 일정의 편의를 봐달라고 사정했다. 李수석은 일본 특파원 시절 야구를 좋아했고 장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장훈의 훈장 수여일을 7월 24일로 맞출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롯데 신격호 회장에게 부탁해 '시즌 중에 선수가 외국에 나갈 수 없다'는 일본 프로야구 규약에 발이 묶인 장훈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장훈은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 바로잡습니다

▶6월 9일자 29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사진 설명 중 리셉션에 참석한 사람은 신격호 회장이 아니라 동생인 신준호 회장이기에 바로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