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가난과 마음의 빈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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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호 22면

몇 달 전 월세를 독촉하는 집주인의 집에 불을 지른 50대 세입자가 있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 25만 원짜리 방에 세 들어 살면서 보증금을 다 까먹고도 3개월 치 월세를 밀렸다고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집주인 부부 역시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저소득층이었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상황을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생계형 범죄자들은 저마다 절박한 사연을 갖고 있다. 칼부림도 가난한 이들끼리 술 한 잔 하다 벌인 사소한 언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할까. 가난이 이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 걸까. 원래 이들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걸까. 사회학이 해석해 온 문제를 최근 뇌과학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결핍으로 인한 고민이 많아지면 마음의 대역폭이 좁아져서 융통성 있는 판단을 하기 힘들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이 줄어들며 생기는 가용성 문제라는 논리이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센딜 멀레이너선 교수와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엘다 샤퍼 교수는 이런 실험을 했다. 승용차가 고장나 수리비로 300달러가 나왔다. 보험사가 비용의 반을 부담한다고 한다. 반을 부담하고 고칠 것인가, 그냥 탈 것인가. 이런 상황을 고민하게 한 후 비언어성 지능검사를 시행해서 판단력을 평가했다. 수리비를 3000달러로 높인 후 같은 검사를 시행했다.

일러스트 강일구

시험 집단을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으로 나눠서 비교했는데, 수리비를 올리자 저소득층의 지능검사 점수가 뚝 떨어졌다. 고소득층은 변화가 없었다. 가상실험이었지만 저소득층 입장에선 1500달러를 내고 차를 수리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인간이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상황에는 한계가 있다. 집세·생활비 같은 절박한 고민이 생각의 바구니를 차지하고 있으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양한 경우를 고려한 선택을 하지 못한다. 당장은 손해라도 미래에는 이득이 될 결정을 못 한다. 지금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에 급급해 충동적이고 비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 손해가 큰 보험을 중도에 해지하는 것도 경제적 빈곤함에 따른 현실적 판단이면서 심리적 결핍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다.

한 번 가난해지면 영원히 마음도 각박해지는 것일까. 인도의 농부를 대상으로 수확 전·후에 같은 검사를 해서 비교했더니 수확 이후에 경제 사정이 좋아지자 검사 결과가 확연히 좋아졌다. 즉, 이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최근의 불황 탓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줄어든 뇌의 대역폭이 충동성을 강화했다. 그리고 ‘타인과 함께’ 보다 ‘나부터 살고 보자’가 우선이 됐다. 사회 전반의 현상이지만 저소득층에게 뚜렷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교육이나 계몽보다 저소득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복지 정책이 실용적인 이유다. 일단 먹고 살만해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작동 방법이라고 과학이 말해준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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