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삼성물산 합병 백기사로 나서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국민연금이 찬성하면 합병 성공을 확신합니다.”

 오는 17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의 표 대결을 앞두고 있는 김신(58) 삼성물산 사장이 8일 입을 열었다. 그는 최근 2주간 미국·홍콩의 투자자들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해외 투자자들은 “삼성물산을 외국 회사에 매각하는 고민은 왜 안 하는가. 아니면 사모펀드에 팔라”고 했다. 반면 국내 투자자들은 “삼성물산이 무너지면 둑이 터지니 잘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최근 엘리엇을 비롯해 헤르메스·메이슨캐피털 등 단기차익을 노리고 들어오는 헤지펀드 공세에 한국 기업들이 무방비 상태인 만큼 ‘잘 싸우라’는 뜻이다.

 그는 “우호지분이 적고 주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기업들은 헤지펀드의 쉬운 먹잇감이 된다”며 “아직 국내에 경영권을 방어할 만한 제도가 없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제 시장의 눈길은 국민연금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곳이다. 최근 투기자본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금융투자업계에선 국민연금이 주도적으로 ‘백기사’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선진국에 비해 국내 경영권 방어장치가 취약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국익과 공공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신장섭 교수는 “국민연금은 1차적으로 수익률을 높여야 하고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국익을 지키는 범위에서 결정을 해야 한다”며 “특히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을 공격할 때 조력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의결권 전문위원인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도 사견을 전제로 “엘리엇에 동조해 막대한 국부를 유출하고 경영 불안으로 인한 투자 위축을 초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엘리엇이 앞으로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4.1%를 지렛대 삼아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 전체로 경영 간섭을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엘리엇 같은 투기자본은 단기간에 주가를 띄우는 데 주력하다 보니 장기 투자나 연구개발(R&D)·고용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짙다. 엘리엇이 반도체 투자를 줄이고, 휴대전화·가전 생산 조직을 분사하며,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본사 해외 이전까지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삼성이 그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최준선 교수는 “헤지펀드는 기업과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며 “이들이 섣불리 경영에 개입해 사업전략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그간 쌓아온 기업 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익률 극대화를 따진다면 국민연금이 반대 입장을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 이번 합병이 무산되면 가장 크게 주식 평가손실을 보는 쪽이 바로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또 삼성물산의 주주인 동시에 제일모직의 주요 주주(지분 5.04%)이기도 하다.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 불리하다는 지적이 제일모직 주주 입장에선 유리한 조건인 셈이다. 삼성물산 합병 반대를 권고한 ISS(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가 제일모직 주주에는 반대로 찬성 권고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연금은 말을 아끼고 있다.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줄 명분은 충분하지만 연금 의결권 자문을 맡은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이 ‘합병 반대’를 권고하고, 재벌을 견제해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핵심 관계자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보고서는 하나의 참고사항”이라며 “9일 내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관련 사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손해용·김현예·정선언 기자 sohn.y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