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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의 삶은 어떻게 나락으로 추락하는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4호 30면

영화 ‘마돈나’ 속의 주인공 여인 ‘마돈나’가 이름인 미나 대신 별명인 마돈나로 불리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가슴 때문이다. 뚱뚱한 미나는 가슴이 큰데, 그녀는 남자들에게 그저 성적 노리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일 뿐이다. 같은 여자들도 그녀를 그저 놀리기 일쑤였다. 여기서 마돈나는 성모 마리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한 시대를 섹스 심볼로 살아갔고 여전히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돼 있는 팝 가수 마돈나를 얘기할 것이다.

영화 ‘마돈나’

하지만 어쩌면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마돈나’는 식물인간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마돈나의 과거 삶을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가를 고발한다. 아,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고발조차 안쓰럽고 끔찍해진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와있는지 자괴스럽기가 그지없어진다.

이야기의 시작은 VVIP의 병동에서 시작된다. 간호 조무사로 일하는 해림(서영희)은 코마에 빠진 한 노인의 생명을 유지시키며 살아간다. 이 노인은 병원 설립자이며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아들이자 병원 경영의 후계자(김영민)는 유산 문제 때문이지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든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려 한다. 노인은 또 한 번의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병원 소유주의 아들은 심장을 구할 요량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교통사고 여자환자를 어디선가 구해 오게 된다.

여자는 무연고자 처리돼 방치된 상태였는데 이미 만삭인 상태다. 여자의 이름은 미나(권소현). 아들은 조무사 해림에게 그녀의 친인척을 찾아 어떻게든 장기 기증 각서를 받아 오라고 명령한다. 해림은 미나의 흔적을 찾게 되고 점점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리 자본주의라 하기로서니 이렇게 악랄하고 비열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든다. 이건 너무 끔찍한 면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닐까. 현실은 이것과는 좀 더 나은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 것인가. 이 영화는 현실의 비현실성을 그린 내용인가 아니면 비현실의 현실성을 그린 작품인 것인가.

영화 ‘마돈나’는 후자, 곧 비현실의 현실성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마돈나’를 보면서 어쩌면 ‘아, 이건 모두 영화적 허구일 뿐이야, 이건 그래서 현실과는 다른 얘기일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점점 더 현실의 근사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비현실의 얘기처럼 시작했지만 사실은 현실의 얘기를 담고 있는 것.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부자들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광란의 몸짓은 실제로 끝간 데가 없다. 뚱뚱한데다 가슴만 크고 못생긴 여자들, 게다가 못 배우기까지 했을 경우 이들이 일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해 봤자 자본주의 내 소시민들의 삶이 어디서, 어떻게, 또 얼마나 빨리 추락할 수 있는지, 그것 역시 매일처럼 목격하는 일이지 않는가.

영화 속 마돈나 역시 콜센터 여직원에서 화장품 제조회사 직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창녀촌의 ‘삐끼’로까지 전락해 간다. 누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과연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해림의 시선을 좇아 ‘미나=마돈나’의 삶을 추적하고 또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해괴한 음모를 들춰 내게 한다.

영화 ‘마돈나’는 장 폴 사르트르가 썼던 『구토(嘔吐)』와 같은 느낌을 준다.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 구토를 하게 됐던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처럼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의식의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옳다. 이 영화를 만든 신수원 감독이 의도했던 것 역시 바로 그 지점에 있을 것이다. 우리보다는 칸 영화제가 감독의 생각을 정확하게 포착해 냈던 듯이 보인다. 영화 ‘마돈나’는 지난 5월 제 67회 칸 영화제의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돼 상영됐다. 이제는 우리가 이 영화를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할 때이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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