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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류직장 편향에 심한 병목현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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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무엇보다 월급이 대기업으로 간 친구들보다 10만원 가까이나 적었다. 큰 회사에 다니는 동창들을 만나면 괜히 꿀리는 기분이었고 집안에서는 물론,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조차도 내심으론 내 장래를 불안해 하는것만 같았다』
81년 S대전기과를 졸업하고 「뜻한바 있어」대기업 대신 중소기업 E전기를 택했던 김영흥씨(27)는 6개월만에 뜻을 꺾었다. E전기를 그만두고 82년 다시 시험을 치러 재벌그룹인 D컴퓨터사에 입사했다. 이른바 「1류직장인」으로 합류하고 만것이다.
『2류직장에 있다가는 자칫 내 인생도 2류로 끝날 것 같은 주위분위기』였다고 김씨는 자의반 타의반 직장바꿈의 동기를 밝힌다.
『물론 우리도 1류대학 출신이 반드시 능력이 낫다고는 믿지 않는다. 인간성이나 충성심등 종합적인 평가에서는 오히려 반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1류대 출신을 뽑아놓으면 동창·선후배들이 요소요소에 산재해 있어 하다 못해 도장을 잘받아 온다든가 어쨌든 일 추진이 빠르다. 현재의 우리 경제사회 여건에서 이런 잇점도 반드시 무시할 수는 없는것 아닌가』
J전자 정원섭이사(48)는 기업이 1류대 출신을 보다 반길수밖에 없는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1류대학, 1류기업, 1류직장, 1류인생….
우리사회전반에 잠재의식으로 깊이 박힌 병적인 1류선호가 가뜩이나 병목으로 좁아지는 학사취업가도에서도 심각한 역기능을 나타내고 있다.
풍요속의 빈곤-.
인재는 많은데 막상 뽑아 쓸 대상은 적다. 직장은 있으나 갈만한 직장은 몇 안된다.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가 사회전반에 불만심리를 누증시켜가는 우려할 상황으로 번지고 있다.
구인·구직 쌍방의 1류집착이 엇갈리면서 적재적소의 경제원리는 무산되고 취업전선의 혼란은 가중된다.
지난해 11월11일 「1류직장」의 표본격인 국내 13개대기업이 처음으로 같은 날 일제히 신입사원 공채시험을 실시했다.
모집인원은 13개사를 모두 합해 8천9백여명. 그러나 실제로는 그중 일부가 특별전형 형식으로 채용이 내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날 시험을 통해 뽑을 순수한 인원은 8천4백여명선.
여기 원서를 낸 대졸자는 자그마치 8만8천5백여명, 실제 응시자는 7만여명이었다. 1만8천여명이 2중지원을 한것이다.
1류대 대입창구의 눈치·배짱작전은 4년시차를 두고 1류기업 취업창구에서도 예외없이 되풀이 됐다.
7만여명이라면 오는 2월 졸업을 앞둔 대학생 12만명중 군입대·대학원진학·외국유학등 숫자를 뺀 8만여명의 90% 가까운 숫자.
쉽게 말해 취업의사가 있는 거의 전 대졸자가 일단은 13개 대기업을 희망한 셈이 된다.
『우리대학 같으면 2월졸업예정자 1백80여명중 대학원 진학 75명, 군입대를 빼고나면 취업 가능한 인원은 20여명인데 대부분이 대기업에 취업이 결정됐다. 요즘도 중소기업에서 취업추천의뢰가 많이 오고 있으나 몇몇 남은 학생들은 거들떠보지 않아 추천을 못해주고 있다.』
서울대 경영대학 취업담당직원 김영길씨(45)의 말은 「1류대」의 즐거운 비명(?)이다. 물론 1류대에서도 올해 이같은 즐거운 비명은 극히 한정된 인기학과의 얘기다.
지난해말 취업정보지 「코리아 리쿠르트」사가 전국대학생 2천7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업의식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3%가 대기업 입사를 희망했고 67·1%가 서울근무를 바랐다.
대졸인력이 대기업만을 원하고 대기업으로만 몰리는 원인의 일부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낙후성에 있다.
전체산업체들의 98·1%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종업원수에서는 전체 산업체근로자의 59·4%, 생산액은 29·2%에 불과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통계)
이웃 일본의 중소기업이 전체산업체 근로자의 70%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고용면에서 크게 뒤져 있다. 그나마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단순노동집약 제조업의 성격을 띠고 있어 대졸의 관리사무직·고급기술인력 흡수능력이나 수용태세가 미약하다.
이 때문에 대졸의 고급인력은 중소기업으로 갔다가도 대기업으로 되돌아 나오고 만다.
서울등촌동 광림전자는 지난해 2월 15명의 대졸사원을 공채했다. 1년만에 이들중 13명이 대기업으로 떠나버렸다.
이 회사 김종섭총무과장(36)은 『결국 중소기업에서는 혈연·지연으로 사람을 구해 쓰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한숨을 쉰다.
김법진국민대학생처장은 『지난해 모두 6백여명의 취업자중 70%가량이 대기업 입사에 실패, 중소기업으로 갔으나 그중 4분의1은 이번에 다시 대기업에 응시했다』고 밝힌다.
대학졸업생의 증가와 함께 취업재수생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은 이같은 1류직장=대기업집착에도 있다.
산업구조가 첨단기술·정보처리를 중심으로 하는 또 한차례 혁명적 개편을 시작하면서 미·일등 선진공업국에선 이른바 「벤처 비즈니스」로 불리는 알찬 중소기업의 신화들이 잇달아 창조되고 있다. 그같은 상황은 과연 남의 나라만의 일일까.
『한국과학기술원 졸업후 몇몇 대기업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웃의 손길을 뻗쳐왔다. 그러나 내 나름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다. 생각이 맞은 후배 4명과 함께 컴퓨터회사를 시작했다』
지난 81년9월 종업원10명, 자본금 5천만원으로 시작해 불과 3년5개월만에 연간매출액 55억원규모의 유명컴퓨터회사로 자란 (주)큐닉스 (서울신사동587) 의 이범천사장(35).
이씨는 보장된 높은 자리와 좋은 보수를 뿌리치고 모험산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성공함으로써 한국에서도 이제 「중소기업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실증한 한사람.
큐닉스는 마이크로 컴퓨터, 한글워드프로세서, 프린터, 소프트웨어를 개발, 판매함으로써 매년 2백%정도의 성장을 거듭, 지금은 종업원 1백20명, 연간매출액 55억원의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83년에는 컴퓨터기술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도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중심에서 기술집약형으로 개선되어야할 때다. 중소기업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 그 중에도 고급인력의 적정 배분시책이 시급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한재열부회장은 중소기업의 질적 성장은 「국민경제의 당면과제」라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은 그 자체의 존립발전을 위해 고급인력의 확보를 서둘러야 하고 고급인력은 보다 더 큰 보람과 자기성장의 기회를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찾을 수 있는 상황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취업전선의 1류병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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