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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째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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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9·11 테러 사흘 뒤인 2001년 9월 14일 뉴욕의 ‘그라운드제로’. 쌍둥이빌딩 잔해 제거와 시신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소방관과 경찰, 자원봉사자와 포클레인이 뒤엉킨 현장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다. 베이지색 점퍼 차림의 그는 먼지투성이 소방관과 어깨동무한 채 핸드마이크를 들었다. “나는 여러분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립니다. 전 세계도 여러분의 절규를 들었을 겁니다. 이 건물들을 쓰러뜨린 자들도 곧 우리의 응답을 듣게 될 겁니다.”

 미국의 경제수도 뉴욕에서 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에 넋이 나갔던 미국인들은 TV로 생중계된 부시의 연설에 전율했다. 처참한 잔해와 흉물스러운 철근 구조물,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소방대원, 그 한복판에 핸드마이크를 들고 선 점퍼 차림의 대통령.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에 비장감은 증폭됐다. 사실 9·11 이전까지 부시는 바닥 지지율에 고전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에게 총 득표수론 54만 표나 뒤지고도 ‘승자독식제’란 미국 선거제도의 맹점 덕에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집권 초반을 선거 무효 논란과 씨름했다.

 그런데 이날 즉석 연설로 그는 단번에 전세를 뒤집었다. 공포로 움츠러든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애국심을 불질렀다. ‘테러와의 전쟁’을 앞세워 그는 2004년 재선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9·11 후 그가 일으킨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이 정의로웠느냐는 별개 문제다. 다만 부시의 연설은 어떻게 하면 정치가가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고전이 됐다. 절체절명의 순간 공포와 슬픔에 떨고 있는 국민들 속에 주저 없이 몸을 던지는 지도자의 모습에 태산 같던 민심도 깃털처럼 움직였다.

 부시에 비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양반이었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1987년 헌법 개정 후 처음 과반 이상 지지율(51.6%)로 당선됐다. 그러나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한 불통 인사와 ‘윤창중 스캔들’로 첫해를 허송했다. 그 와중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국민은 사고 즉시 점퍼 차림의 대통령이 나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학생들을 구하라”고 독려하는 장면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7시간 동안 행적조차 오리무중이었다.

 사고 다음 날 진도 팽목항의 실내체육관에서도 대통령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경호원이 이중 삼중 에워쌌다. 앞서 정홍원 총리가 성난 유가족들로부터 물세례를 받았던 터라 경호실은 예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성능 마이크를 든 단상 위 대통령의 모습에선 그라운드제로의 부시를 떠올릴 수 없었다. 만약 단상 아래로 내려가 유가족을 얼싸안은 채 정부의 늦장 대처를 질타하고 현장에서 사고를 수습하는 진정성을 보여줬더라면. 그래서 민심을 돌려놨다면 올 초 사정의 칼을 뽑을 필요도, ‘성완종 리스트’에 휘둘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첫발을 놓친 대통령에게 지난달 20일 한 번 더 기회가 왔다. 국내에서 첫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진환자가 나온 날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번에도 한 박자 늦었다. 3차 감염자가 나온 지난 2일에도 전남 여수의 창조경제혁신센터에 갔다. 그사이 4개나 되는 ‘컨트롤타워’는 우왕좌왕했다. 방역망은 뻥뻥 뚫렸다. 확진환자가 나온 지 16일 만에야 노란색 점퍼 차림의 대통령은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았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민심을 저만치 비켜간 뒤였다.

 한데 메르스 대처 실책을 사과하라는 압박에 대통령은 여야 모두를 향해 역공의 화살을 날렸다.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다. 내년 4월 총선, 내후년 12월 대선에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겠다는 승부수다. 그러나 청와대와 국회의 충돌로 당장 ‘식물국회’가 재연됐다. 민생 법안은커녕 다급한 경기 부양 추가경정예산의 국회 통과마저 불투명해졌다. 세월호와 메르스·가뭄 삼각파도에 이미 기운 한국경제호가 이대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 태풍까지 만난다면 어찌 될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경제를 파탄 내놓고 선거에서 이긴 정권이 있던가.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