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할렘가를 파고드는 억척상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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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을 벌려면 흑인촌을 공략하라』-.
비교적 뒤늦게 미국으로 뛰어들어 「가발경기」를 놓친 후기의 이민대열들은 용감하게도 흑인촌까지 진출 억척스럽게 경제적 자립을 구축한다.
시카고와 워싱턴이 그러하며 세계적으로 악명 (?) 높은 뉴욕의 할렘가에서도 코리언의 근면과 성실은 알려진지 이미 오래다.
맨해턴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할렘의 125가로 들어서면「정스패션」「동흥식품」 「킴스 디스카운트」등 낯익은 삼호가 줄이어 나타난다. 의류점·튀김집·식품점·청과상·가발상·장신구점등 125가 선상의 교포업소만도 42개소이며 이지역 전체로는 1백67개소. 할렘의 코리언파워는 이처럼 그 규모부터 엄청나다.
할렘이라면 주변의 유색인종마저 출입을 꺼리는 위험스럽고도 지저분한 흑인촌.
살인·강도·절도등 범죄발생률과 실업률은 물론 미혼모출산율마저 전국 1위를 자랑 (?) 하는 이곳에서 생활터전을 잡고있는 우리 교포들의 심장도 어지간한 듯 싶다.
『하긴 그래요. 신변이 안전하달수 없는게 약점이지요. 걸핏하면 쏘고, 또 쏘았다하면 사건이 커지고요』-. 할렘생활 만10년의 최고참이자 할렘 번영화장을 맡고 있는 김원덕씨(49)의 말처럼 현지교포사회가 안고있는 고민이라면 안전문제로 집약된다.
실제 뉴욕포스트등 현지 신문을 보면 사건이 터졌다 할때마다 범행장소는 으례 할렘주변이며 범인 역시 현지흑인이 주류를 이룬다.
이처럼 빈도 높은 범죄는 교포사회에도 그대로 적용, 최근 한 교포회원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사건을 필두로 하루의 수금을 몽땅 털린 경험등 그 피해도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정착한 교포는 이곳을 떠날줄 모르는터에 그 숫자도 날로 증가, 흑인과의 관계는 이제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다.
두말할 나위조차 없이 일한 만큼 벌 수 있고 또「속전속결」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용이하다는 점이 매력을 끈다는 풀이다.
『8년전 개업시엔 총맞아 죽으면 어쩌나 싶더군요. 그동안 여러차례 털렸고, 또 돈도 벌였지만』-. l25가 선상에서 흑인상대로 가발점포를 경영하는 장성춘씨(34)의 말 그대로 교포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돈벌이와 신변안전이다.
튀김집의 서창선씨(46)와 장신구점의 맹수철씨(36)도 장씨와 똑같은 견해.『치안상태만 좋아진다면 이처럼 좋은 지역도 없다』며 오히려 긍정론 일석-.
따라서 이곳의 교포사회는 이처럼 짭짤한 지역임이 알려지면서 그 규모가 불어나가자 또 다른 고민속에 빠져든다.
예컨대 125가 선상에서 개업중인 교포경영의 해산물상점만도 무려 5군데. 「점포임대」 란 신문광고가 나오면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코리언이며 그럴듯한 위치의 점포라면 임대여부에 관계없이 한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 동업자간의 덤핑판매는 물론이며 경우에 따라선 사업정보의 교환마저 어려운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흑인상대로 돈을 버는 방법 또한 극히 아이로니컬하다. 한마디로 교포의 밀집화 현상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물건만 마음에 들면 그대로 산다』 는 흑인사회의 충동구매가 끌어들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부로부터 극빈자생활비를 받아쥔채 식품점으로 걷다가는 원색의 옷이나 구두가 발견되면 그대로 상점으로 뛰어드는 이들의 습성 탓이다.
따라서 이들의 빈곤은 사라질리 없고 대신 교포가 경제적으로 안정된다는 것은 당연지사. 때문에 흑인사회일각에서「코리언 고 홈」 (한국인 물러가라) 의 소리가 높은 것도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각 업소나 번영회가 그동안 흑인과의 관계개선을 등한시 한것도 아니다.
현지의 행사라면 대소를 가리지 않고 참여해 재정적으로 지원했을 뿐더러 흑인종업원을 대거 고용, 사회문제까지 참여해도 이들의 불만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여기에 습관과 언어의 차이점도 현지교포가 뛰어 넘어야하는 또 다른 장벽-.『할렘서 돈 벌어가지고 주거환경이 좋은 뉴저지에 산다고 해서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유태인을 보세요. 그들은 아무리 돈이 많다해도 할렘으로 올때면 으례 허름한 차림에 지하철만 타고 다니지요』- 흑인촌에 살려면 그들에게 피해의식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김원덕 회장의 말이 그토록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뉴욕=이근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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