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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늦어진 부모님의 칠순 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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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식
강인식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

부모님은 1945년생 해방둥이 동갑이다. 두 분 모두 황해도에서 태어나 전쟁 통에 남으로 내려왔다. 과수원을 소유한 아버지네는 ‘지주는 처벌한다’는 소문에 빈손으로 군산까지 피란했다. 어머니네는 잠깐 몸을 피한다는 생각에 ‘저기 눈앞에 보이는 섬’ 백령도로 건너왔다. 이동한 거리엔 큰 차이가 있었으나 돌아가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두 분은 초등학교만 마쳤다. 8남매의 맏딸인 어머니는 철들기 전부터 동생들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는 진학할 수도 있었다. 근면한 할머니가 땅을 빌려 쌀을 수확한 어느 가을, 정미소 주인이 마을 쌀을 챙겨 야반도주했다. 이듬해부터 아버지는 학교 대신 논에 나가야 했다.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패스한 열아홉 아버지는 하사관에 지원했다. 그리고 백령도로 발령받았다.

 그렇게 두 분은 섬에서 만났다. 고향과 나이가 같은 두 젊은이는 만나자마자 끌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는지 모른다. 50년 전 사진엔 무명 치마에 양산을 받쳐든 섬처녀와 군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어린 군인이 서 있다. 지금의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린, 새파란 청춘의 연애 장면이었다.

 부모님에겐 세 자녀가 있다.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을 겪었다. 그 후유증으로 섬에서 낳은 두 아이가 병을 얻었다. 제왕절개를 해야 했지만 뭍에 나올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두 분의 셋째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유일한 자식이다.

 얼마 전 두 분의 칠순 잔치를 열었다. 돌이 지난 손주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할아버지·할머니와 다양한 포즈의 사진을 남겼다. 요즘 부쩍 마른 아버지는 손주를 안고 수백 개의 주름살을 만들며 웃었다. 원래는 우리 나이 일흔이 되는 지난해에 고희연을 열어야 맞다. 하지만 어머니는 만 70세에 하겠다고 고집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며느리·손주가 함께하는 잔치를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그려왔던 것 같다. 늦었지만 지난해 손주가 태어나면서 어머니는 만 70세라는 괜찮은 핑계를 찾아냈다. 어머니는 전쟁 중에 당신의 친아버지와 생이별했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은 그녀에게 평생 숙제고 바람이었을 것이다.

 1950년 여름, 정확히 65년 전, 두 분은 피란 행렬 속에 섞여 있는 어린아이였다. 그때 두 가족의 기반은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부모님은 평생을 유지한 성실함으로 가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여섯 살에 일어난 전쟁이 인생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두 분은 믿고 있다. 꼭 6월이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한 해 늦어진 부모님의 칠순에 나는 짠해졌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