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6)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129) 청전의 그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청전은 192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퇴사할 때까지 소설 삽화를 그렸다. 이무렵이 청전의 화력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어서 그는 1925년 제4회 「선전」 때부터 1934년 제13회때까지 10년에 걸쳐 특선을 받았다.
그는 1938년부터 「심사삼여」가 되었다. 이당 김은호는 한해앞서서 1937년부터 「심사참여」가 되었는데, 「심사참여」란 동경에서 오는 정식심사원의 보조역으로 심사하는데 참석해 의견을 말할수 있는 자격을 준 것이었다.
청전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제1회때의 인선작 『추강귀어』 로부터 제3회때의 입선작 『추산수사』까지는 독자성이 뚜렷치못한 작품이었으나 제4회때의 특선작 『수슬』, 제5회때의 『휘장』,제6회때의 『우슬』, 또 그다음 제7회때의 『산지음』들은 모두 독창적인 세계를 이룬 수작들이었다.
고하 송진우는 술자리에서 청전을 보고 『청전의 그림하고 안서의 시는 천편일률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단 말야!』하고 놀렸다지만 청전의 산수화는 그런말을 들을만큼 구도가 늘 같았다.
모연이 자욱한데 밋밋하게 느린 경사를 이룬 야산 언덕, 그리고 그 등 너머로 초가 지붕이나 오랜 기와집 또는 성벽이 빠끔히 보이고 그 너머 둔덕을 따라 내려오는 오솔길에 초부가 나무를 등에 지고 내려 오는 모습, 이것이 청전의 수묵화의 정형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묵만 하더라도 물에 탈때 그 농담에 따라 무궁무진한 색채감을 낼수 있으므로 같은 모연·연운이라도 다다르다는것이다. 청전은 이 발묵법의 오묘한맛을 터득해 남이 흉내낼수 없는 독창적인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청전의 수묵산수화가 높이 평가되는 까닭인데,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청전은 남몰래 피눈물나는 노력을 계속하여 왔다고 한다.
이런 전문가적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그의 술마시는 모습을 보면 그의 성질과 같이 차분하고 얌전하다. 키가 작고 귀공자 타이프로 생겼는데 조용하고 말이 적다. 묵로와는 정반대로 조용하게 한잔 한잔씩 차근차근 술잔을 비워 가는데 유주무량으로 한량이 없다. 그렇게 많이 마셔도 주정도 없고 주사도없다. 그러나 그뿐인가. 청전이 술자리에서 하는 재담은 가의 천하일품이다. 자기는 한번도 웃지 않으면서 남을 배꼽이 빠지도록 웃기는 것이다.
그는 노모에게 효성이 대단하듯이 자녀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퍽 컸다.
청현산방을 깃기 전에, 그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던 해에 제8회「선전」 에 출품한 『만추』가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아 그 상금을 밑천으로 누상동 집을 샀다. 그 짐에서 여러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다가 변소에 갔다 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였다.『우리 이제 집에서는 술 마시지 말세.』
여러 사람들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 하니까 청전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뜰아래 있는 뒷간에 가는데 뜰에서 청전의 아들과 동네에 둘이앉아 소꿉놀이를 하는데 주전의 아들이 동네애한테 소꿉놀이 술잔을 주면서 이런 소리를 하더라고 한다.
『자,어서 이 잔 들어. 칵칵, 에이취한다!』
이 꼴을 보니까 오싹 소름이 끼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서는 큰일나겠다고 방에 들어오는 길로 그런 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청전은 집에서는 일체술상을 벌이지 않았는데 그때 술놀이를 하던 애가 몇째 아들이었던지, 큰아들 건영이는 자라서 훌륭한 화가가 되었지만 납북되어 청전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