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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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제 고인이 된 최순우극립종합박물관장의 집엔 「오수당」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오수는 그의 아호. 「낮잠」이란뜻이다.
그 아호에서 세상을 느긋하게 살아보겠다는 인품을 느끼게 된다.
오수 최순우는 평생을 박물관에 바친 사람이다.
『박물관은 나의 무덤』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박물관에 묻히겠다는 뜻이 아니라 박물관사업과 가치를 위해 온힘을 쏟겠다는 뜻에서다.
그가 박물관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향땅 개성에서였다.
송도고보를 나와 여학교의 강사로 있으면서 문학수업을 하던중 우현 고유섭을 만나고 나서다.
개성박물광장이던 우현은 그에게 미술사연구를 권하고 개성 남산의 청자 가마를 찾도록 독려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첫번째 연구과제를 고려청자로 잡았다.
우현의 제자로서 황수영, 진홍섭을 만난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박물관 이사짐을 가장 많이 싼 사람이라고 한다.
광복과 함께 개성박물관 유물을 옮겨오고 6·25때는 문화재 피난을 주도했다. 현재의 학술원 자리에서 부산으로, 다시 남산과 덕수궁 현대미술관, 그리고 현 경복궁 자리까지 대이동을 여러번 했다.
85년엔 중앙청 자리로 옮길 참이었다.
그는 박물관 출신의 첫 관장승진기록도 세웠다. 그동안 국립박물관장은 초대 김재원, 2대 김원용, 3대 황수영등 모두가 박물관밖의 인사였다.
박물관 기능을 문화재의 보관, 전시에서 사회교육과 휴식공간화한 과감한 개혁도 했다.
「박물관대학」강좌를 설치한 것도 그였다.
그 세월 동안에 그가 파악한 한국미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 색채나 의장이 담담하고 욕심이 없어 대범한 아름다움이다. 조촐한 샘터에서 소리없이 솟아나오는 맑고 담담한 샘물처럼 순정과 자연스러움이 스며 있다.』
중국 미술이 기름지고 화려한것, 권위와 큰것을 숭상하고 일본미술이 다채롭고 신경질적이며 재치와 기교를 숭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런 심미안을 가진 오수는 『천천히 인생을 여유있게 살수 있었던것은 어머니가 강조하시던 인내와관용, 이해정신이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처럼 조촐하고 유연하게 인생을 살았던 그는 이제 영원의 오수에 잠겼다.
그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런삶의 자세를 오래 가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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