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對日 항쟁기’로 부르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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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30면

금년은 일제에겐 패망 70주년이고, 우리에겐 광복 70주년인 해다. 또 봉오동대첩 전승 95주년이기도 하다. 봉오동대첩은 일제 정규군과 우리 독립군이 최초로 벌인 전투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와 최진동 선생의 의병부대는 처음으로 공동작전을 전개해 값진 승리를 얻었다. 이 교훈이 후에 서일 장군을 중심으로 김좌진·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진다.

봉오동 전승 기념행사를 위해 최근 중국 길림성 도문(圖們) 일대를 다녀왔다. 비록 전투 현장은 저수지로 수몰됐지만 인근에 승전기념탑이 세워져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했다.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일행과 봉오동을 지키는 수남촌의 동포들은 한 마음이 돼 엄숙하게 기념식을 마쳤고, 전투 현장을 답사했다. ‘대일 항쟁’이란 용어가 한·중 양국에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주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응징하는 결의로 표현되었다.

나는 새삼스레 용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무슨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란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어를 쓰고 있다. 이를테면 ‘을사보호조약’이란 말이 그렇다. 원래 정식명칭은 제2차 한·일협약인 ‘한일협상조약’이었다. 그런데 이를 을사보호조약이라 해 마치 우리가 보호를 요청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우리가 그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는 말인가.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 주권을 빼앗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을사늑약’이라 부르기로 했다.

일제가 침략을 한 기간을 흔히 ‘일제 강점기’라 하는데, 이 또한 대단히 부끄러운 용어다. 일제가 우리를 강점했다고 그들은 말할지 모르나 우리는 이에 굴복한 바 없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의 공식문서엔 대부분 ‘일제 강점기’란 용어가 보편화돼 있다. 이 말을 곰곰이 새겨보면 일본의 한국지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우리 스스로 당시 일본국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이런 용어로 위안부나 대일청구권 문제를 제대로 따질 수 있겠는가.

대일 항쟁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중국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미주·러시아에서 항일투쟁에 몸 바쳤던 많은 분들도 결국 일본에 의해 반동분자나 테러리스트 정도로 표현될 소지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보훈정책이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근거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독립투쟁에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고 있다. ‘일제 식민지’나 ‘일제 강점기’ 등의 학술·행정용어는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사회 의식구조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우리의 능동성보다 피동성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체적 입장에서 표현하려면 당연히 ‘대일 항쟁기’로 바로잡아야 한다. 대일항쟁 36년 만에 승리를 거뒀다는 관점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외세 침략에 맞서 피로 싸워 지켜온 데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현대,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광복 70년이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일제 강점기’가 아닌 ‘대일 항쟁기’로 말이다. 그동안 이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미약했다. 이번에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국회에서 이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 국민들에게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 자긍심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

50년대 가수 현인이 불렀던 ‘고향만리’라는 노래가 있다. 3절에 ‘보루네오 깊은 밤에 우는 저 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서 우는 거냐, 모르고 우는 거냐’라는 대목이 있다. 대일 항쟁기에 일본군에 의해 남방으로 끌려갔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하루하루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다 지쳐 부른 노래다. 우리 의식은 아직도 보루네오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

이종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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