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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는 살아도 아내 없인 못 산 남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2호 32면

저자<.b>: 김복순 출판사: 현실문화 가격: 1만5000원

남자는 아랫집에, 여자는 윗집에 살았다. 결혼 생각이 없었지만 부모 성화에 못 이겨 문득 처자를 눈여겨보게 된 남자,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부모의 뜻에 따라 부잣집 의사와 약혼까지 한 상태. 그 소식을 들은 남자는 상사병으로 앓아눕고 만다. 아비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다 못해 여자네를 찾아가 제발 딸을 달라 청하고, 여자네는 ‘남의 집 장남 아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마음을 바꾼다. 이제 기운을 차린 남자가 여자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

『박수근 아내의 일기』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 절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화가 박수근과 아내 김복순이다. 박수근이란 이름을 대한민국에서 모를 이는 없겠지만 이런 개인사가 구구절절 알려진 건 아닐 터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곁을 지켜온 아내는, 하여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입체적으로 써내려 간다. 1980년 선화랑에서 출간하는 잡지 ‘선미술’에 연재되고 소책자로도 나왔던 것인데, 박수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처음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화가의 인생이 한국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질곡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능이 열여덟에 ‘선전(鮮展)’에 입선할 정도였다는 점은 잠시 잊자. 그 껍데기를 벗겨 내면 그는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한 순정남 그 자체였다. 극적으로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새 직장을 찾아 평양으로 떠나게 되자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던 그다. 오죽하면 시어머니가 ‘받기는 받되 매일 답장을 하지말라’는 엄명을 내렸을까.

형편이 어려워 다른 여인네들처럼 아내가 털 속치마를 입지 못하는 걸 자책했고, 아내의 생일날에는 차비를 아껴 모아 늘 고기와 과일을 사들고 들어갔다. 아예 아내를 모델로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질하는 여인’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이런 남편을 아내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이는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는지 마치 잃었던 보물이라도 얻은 양 애지중지 보살펴주셨다.”

게다가 대단한 애처가인 동시에 법 없이도 살만큼 성정이 온화했다. 그림 값을 떼어먹은 사람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오죽하면 그러하겠느냐고 이해하고, 노점에서 과일을 사더라도 한 곳에서만 사면 주변 행상이 섭섭해 할까봐 몇 개씩을 나눠 샀다. 한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왔는데도 창문만 내다보며 “여보 도도도둑놈이 왔어”라며 내칠 생각을 못했단다.

이 모든 소소한 일화들은 지극히 소소하고 사적이지만 동시에 인간 박수근의 삶이 예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거리와 장터, 아낙네와 청소부, 판잣집과 농가 등을 그린 작품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1950년대 이 땅의 정서를 절절하게 예술로 승화시켰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책 속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 67점이 수록돼 있다). 부록으로 실린 유홍준의 비평 한 대목은 그래서 곱씹으며 읽어 볼 만하다. “1950년대를 보내면서 그 시대 인간, 특히 서민 또는 민중이 갖고 있는 삶의 정서를 박수근 화백만큼 절절한 감정으로 표현한 학자가 있습니까, 정치가가 있습니까, 사상가가 있습니까, 소설가가 있습니까?” 우리가 박수근을 영원한 ‘국민 화가’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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