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 불량배" 양산하고 있는게 아닐까|이만열<숙명여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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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몇가지 교육계의 모습들이 세모의 풍경을 재촉한다. 대학입학학력고사가 있어 부모들의 가슴을 조이는가 하면 대학졸업반은 사은회라는 이름의 연례행사를 치르기에 바쁘다. 신문광고란에는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사원모집광고가 시선을 모으고, 졸업예정자들 중에는 지금쯤이면 몇번의 응시에서 낙방한 경험을 가지며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좌절을 되씹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올해가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닌데 신문사회면에는 대입학력고사를 마친 고3학생들이 지금까지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듯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단다.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바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맘때에 그들이 야기시키는 문제는 점차 광역화되고 심각해진다는 추세라고 한다.
이와 대조나 되듯 대학졸업반의 사은회잔치는 점차 화려해져 이제는 웬만한 호텔이 아니면 격에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호텔이라는 말이 주는 사치성 의미때문에 필자는 올해도 사은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해버렸다. 선생들이 학부형들의 쪼들리는 살림형편을 의식하고 있다는것을 알았다면 호텔같은 다소 거북한곳에서 사은회를 개최하지는 않았어야한다.
학기말고사나 대학입시 무렵이되면 부모와 학교의 학생들에대한 계절적인 압력도 가중된다. 새벽과 밤중에 등하교하는일이 상습화되어가고 있지만 기성세대는 죄책감을 느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할까봐 밤중에 하교한 자녀를 책상에 몰기 바쁘고 수면시간을 줄이도록 닥달한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벌써 공부에 주눅이 들도록 만들어놓는다.
며칠 전 20세기 초기에 한국에 왔던 한 선교사가 당시 선교학교의 교육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쓴것을 읽고오늘의 우리의 교육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성령께서 주장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학교는 한국땅에 위협을 주는「교양있는 불량배」를 양성하는 기관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학교가「사회에 위협을 주는 교양있는 불량배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구절에 필자는 충격을 금치못했다.
정말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쳐간데다, 그선교사는 거의 한세기전에 한국교육문제의 핵심을 벌써 내다볼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생각은 곧 해마다 고등교육을 받은 수십만명의 지성인들이 흐린 연못에 깨끗한 물을 대듯 사회에 배출되는데도 우리사회의 인격적 성장은 왜 기대하기 어려운가하는 평소의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은 교육이「교양있는 불량배를 양성」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또 돌아가게되었다.
세계 어느나라 못지않게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다 학생들의 향학열 또한 미덕으로 칭송되어지고 있다. 교육기회는 확대되고 교육여건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교육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인듯 한데 우리의 교육은 점차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으며 교육의 결과는 그 교육이 목표로 했던 것과는 점차 멀어지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해 볼때마다 수십년간 교직에 종사해온 필자는 필자의 무능과 불성실, 피교육자 앞에 내놓을만한 인적이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정책이나 부모의 성의나 사회의 성원을 기대하기전에 교육자인 자신에게 먼저 문제가 있음을 통감하며, 이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한편 정보기능이 다양·활발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교육문제가 이제 학교교육의 차원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교직자의 인격과 성실로써 해결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 학교에서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더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보장되어 있는 가정과 사회가 교육문제의 책임을 분담 내지는 더 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격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소박한 생각이다. 이것은 부모와 가정이 더 큰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의 책임을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근대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제시할만한 교육적 사표가 없음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한말일제하 민족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들이 있으나 그들의 말로는 해방된 조국에서조차도 비참하였다. 여기에서 젊은이들은 희생과 봉사와 지조가 개인적으로는 극히 불행한 삶이라는 것을 눈치채 버렸다. 오늘같이 물량주의·감각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사회풍조를 따라 공부의 목적을 잘 사는 것과 결부시키고, 의롭고 바르게 사는 인격의 문제와는 관련시키기를 꺼려한다.
그리하여 권력과 재벌과 출세가 교육의 포상이되었고, 축복만능의 물량적 종교지도자가 신학도의 미래의 표상이 되어간다. 정직과 신의, 자기회생과 봉사, 개인이 손해보더라도 공익을 앞세워야하겠다는 교육적 인간관은 도외시되고 양보의 미덕은 이 경쟁사회에서 어리석음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게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권력군상들이 보여준 몰염치한형태들이 교육적 표상 설정에 얼마나 어지러운 가치관을 심어주었는가 느껴본다.
세모를 맞아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에는 이상주의자도, 행동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의 그 이상과 기개가 사회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불타고 행동화되어야 이 사회에 희망이 증가될 터인데, 염려되는것은 그들이 얼마 안있어 현실에 타협·안주하는 소시민으로, 나아가서는「교양있는 불량배」로 전락되어 버릴까하는 점이다. 우리 모두「교양있는 불량배」의 위치에 서있지 않은지도 점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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