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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머슴’ 자청한 옥천군 16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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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0m쯤 물러나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연락을 받고 나온 70대 메르스 자가격리자(사진 가운데)는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전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17일 옥천군청 공무원들이 라면과 생수 등을 대문 앞에 내려놨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5일 충북 옥천군청 민원실. 이문성(56) 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때문에 격리된 80대 할머니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이 팀장)

 “기침은 없는디, 반찬두 없슈. 김치찌개 끓이게 김치랑 감자 좀 부탁해도 될까유.”(할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민원실을 나선 이 팀장은 근처 수퍼마켓에서 김치·감자·양파를 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김치찌개엔 돼지고기가 들어가야 맛있잖아.’ 목살 한 근을 주문한 그에게 정육점 주인이 물었다. “웬일로 근무시간에 온겨?” 사정을 들은 정육점 주인은 “그 할머니 건강하셔야 혀”라며 덤으로 반 근을 더 내놨다.

 동이면 세산리 할머니 집으로 간 이 팀장은 대문 앞에 장바구니를 놓고 전화했다. “가져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접촉할 수 없어 집어가라는 것이었다. “얼마 들었느냐”는 할머니 말에 이 팀장은 “괜찮아요. 나중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 할머니가 천식이 심한 할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어 받기가 좀 그랬다”고 말했다.

 옥천군 공무원들이 자가격리 주민들의 머슴이 됐다. 메르스 90번 환자(사망)와 같은 병원에 갔던 주민 80명이 자가격리된 지난 8일부터다. 일단 보건소 직원 66명이 이들을 맡았다. 이튿날 메르스 대책회의에서 김영만(64) 옥천군수가 말했다. “격리된 분들 잘 돌봐드려야 하는데 보건소 직원만으로 되겠느냐.”

 비상시 행동요원으로 정해져 있던 군청 직원 중 94명이 합류했다. 보건소 직원까지 모두 160명이 2인 1조로 격리 주민 80명을 맡았다. 수시로 전화해 몸에 이상은 없는지, 필요한 물품은 없는지 묻는다. 공무원들은 이내 주민들이 부탁하면 반찬거리 배달부터 마른 논에 물 대기, 약 타다 주기, 공과금 대납까지 하는 만능 심부름꾼이 됐다.

 기획감사실 이선옥(40·여) 주무관은 70대 할머니를 맡았다. 도매시장에서 감자를 떼어 5일장에 팔고, 그걸로는 벌이가 모자라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였다. 이 주무관은 할머니를 위해 폐지를 주웠다. 자신의 집에 있던 종이박스까지 더해 10㎏을 할머니 집 앞에 놓고 고물상에 연락했다. 고물상이 두고 간 폐지 값은 800원이었다. 이 주무관은 “우유 하나 값 벌었다고 할머니께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안내면사무소 도재선(46) 팀장은 지난 11일 격리된 40대 여성 주민으로부터 “시아버지에게 30만원을 송금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주민은 팀장에게 현금카드를 내주고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도 팀장은 “‘나를 이만큼 믿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옥천보건소 직원들도 심부름에 동참했고, 고민 상담까지 해주게 됐다. 이소나(55) 진료팀장이 그랬다. 한 가족이 “비닐하우스에 다 자란 애호박을 거두지 못해 썩을 것 같다”고 호소했다. 이 팀장은 군청에 사정을 얘기했고, 애호박 농사를 짓는 가정은 피해보상금 500만원을 받게 됐다.

 격리자 보호에 매달리다 보니 다른 일에 지장을 받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이 있어 군청에 찾아온 주민들에게 “격리된 분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나는 급할 것 없으니 그것부터 먼저 하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옥천군에서는 자가격리 주민 중 아직 메르스 환자가 나오지 않았다. 오는 22일이면 자가격리가 모두 풀린다. 주민 장모(70·여·옥천읍)씨는 “다들 지성으로 돌봐주는 덕에 메르스에 안 걸리는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총각이 내 담당인데 격리 풀리면 꼭 중매 서주고 싶어유.”

옥천=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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