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심의 계수싸움보다 「가성」 더 높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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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해예산안이 1일밤 본회의에서 한푼의 규모삭감도 없이 정부원안대로 통과됨으로써 국회예산심의권의 한계를 다시한번 드러냈다.
국회의 예산안심의가 무조건 삭감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번 11대국회 마지막 예산심의의 과정을 보면 여야가 변명하기 어려울만큼 졸속심의였다.
상임위 예비심사→예결위→계수조정→본회의통과등 전심의 과정을 통해 어느 한대목 진지하게 문제가 검토·토론된 일이 없었고 가장 중요한 심의과정인 예결위의 종합심사는 27일간의 기간중제대로 회의를 한것은 7일 남깃이었다.
이같은 졸속심의는 물론 예산심의기간중 정치의안처리문제로 10여일 국회가 공전되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산안심의에 관한 여야의 진지성 결여와 야당의 원내전략부재 및 정부원안고수라는 여당의 경직성등이 더 큰 원인이었다.
예산심의가 계수싸움이 아니라 선거를 의식한 속기록배포용 「가성」만이 더 높았고 처음부터 여야간에는 「법정시한 준수·표결처리」라는 묵계(?)가 있었던 것 같았다.
우선 전심의과정을 통해 이렇다 할 쟁점의 부각이 없었다. 야당측은 국민부담을 명분으로 일연의 세법개정안을 냈었지만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의지나 노력은 거의 보이지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으로서 요식적으로 제출만 했을뿐 정부·여당이 들어줄리 없다는 체념(?)이 처음부터 깔려있었다.
예산안 심의에 임하면서 민한당은 당초 세법개정을 통해 3천6백22억원을 깎고 세출에서는 2천62억원을 삭감한다는 투쟁목표를 제시했고 국민당은 세입·세출 모두 6천3백89억원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삭감목표가 민정당에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한당은 2천억→1천억→5백억원으로 어떤 원칙도 없이 무우갈라내듯 제시하다가 급기야는 세법안이 재무위에서 부결된 직후 1천6억원이라는 최종카드를 내놓았다.
이처럼 민한당의 삭감목표는 원칙도 일관성도 없었고 근거 역시 박약했다. 자당의 세법개정안은 절충초기에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상태였다.
민정당은 「87년 상반기부터 지자제실시」라는 정치의안 협상타결이후 예산안심의는 밀어붙여도 야당이 강경투쟁을 않으리라는 계산아래 움직인것 같다.
그런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민정당도 처음부터 『세법개정은 86년에 일괄적으로 한다』 『세입은 한푼도 더 깎을수 없다』 『세출에서 5백억원을 깎으려면 예산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커야 한다』는 식으로 야당을 가볍게(?) 요리해 냈다.
여당이 정부원안을 옹호하는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무력한 파트너 (야당) 로 인해 예산심의가 손쉽게 넘어가는것만 생각했다면 정국을 주도하는 여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수없다. 국회가 예산안을 「진지하게」심의하는 「모양」을 갖춰야 하는건 여야의 공동책임이자 여당의 더큰 책임인 것이다. 시늉만으로 끝난 예결위 분료위별 심의, 제대로 하지도 못한 계수조정등 이번의 예산심의과정에서는 제대로 모양을 못갖춘 대목이 너무 많았다.
민정당이 야당의견을 전혀 묵살한채 국채이자등 11개부문에서 3백6억원을 삭감해 다분히 선거용 선심성이 강한 일반도로 건설등 20개 사업에 증액시킨 조정안을 통과시킨것도 문제다.
깎아봐야 어차피 지출하게돼 있는 국채이자 22억원을 깎은 것이라든지 가뜩이나 부족한 수출입은행출자금 1백억원을 삭감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고 이같은 삭감에 동의해준 정부측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이밖에 이번 심의과정을 통해 지적된 문제점은 운영면에서의 중복성이다.
상임위의 예산심의권이 부활된 이후 처음으로 본격실시된 이번 심의과정은 상임위 예비심사→예결위 전체회의→5개 예결위 분과위→계수조정심의 소위등의 단계를 거쳐 최종안을 마련했는데 상임위나 분과위에서 그나마 제기된 문제점과 소수의견이 전혀 예산에 반영되지 않았다는점이다.
결국 한달이상 논의된것들은 완전히 젖혀둔채 「정치적고려」만 반영된 심의로 끝나 국회주변에선 벌써부터 불필요한 심의절차를 생략해야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는데 이것은 국회법을 개정해 상위예비심사를 부활시킨 야당에는 실로 체면이 안서는 일이다.
특히 예결위 분과위심의는상임위의 예비심사와 완전히 중복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내년부터라도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있다.
11대 국회를 마무리 짓는 예산국회가 선량들의 력부족탓인지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탓인지 형식적인 심의 끝에 정부원안을 고스란히 넘겨준 것은 어딘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교흥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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