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WHO의 메르스 대응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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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세계보건기구(WHO)와 한국 전문가로 이뤄진 합동평가단이 13일 국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의 요인으로 감염병에 대한 의료진의 인식 부재와 함께 의료쇼핑, 병 문안, 가족 간병 등 우리의 의료 관행을 꼽았다. 이는 그간 선진화됐다고 자부해온 한국의 의료체계와 병원문화를 바닥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WHO 합동평가단은 지난 8일 입국해 9일부터 닷새 동안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문제점을 분석해 이날 이 같은 내용의 조사 결과를 내놨다.

특히 “의료쇼핑(환자들이 더 큰 병원으로 옮겨다니는 일) 관행이 (메르스 확산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한국은 건강보험제도에서 정한 적은 금액의 진료수가 덕분에 환자들의 의료기관 문턱을 충분히 낮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값싸고, 응급실만 가면 큰 병원에 입원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병원 쏠림현상이라는 부작용도 유발했다.

문제는 그런 의료 시스템이 감염 확산에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WHO의 지적대로 메르스 사태에서 감염자가 응급실을 비롯한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해 병원체인 바이러스나 세균을 확산하는 요인이 된 데는 한국 의료시스템도 한몫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된 환자의 경우 복잡한 응급실에 머물며 다른 사람에게 대대적으로 바이러스를 전파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붐비는 응급실 때문에 예방통제장치가 제대로 작동 못해 한 환자가 여러 사람에게 병원체를 옮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WHO 합동평가단의 지적을 정부와 의료계는 경청해야 한다. 이제 후진적인 감염병 대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의료전달체계의 대대적인 정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다인 병실에 여러 명의 환자가 머무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정부와 의료계는 앞으로 응급실 출입구를 감염병·외상·소아 등 분야별로 나눠 감염 확산을 막는 일에서 시작해 입원실도 안전한 1인실 중심으로 개편하고, 수가체계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개혁에 나서야 한다. 병원에서 오히려 병을 얻는 '병원 감염' 예방은 이제 한국 의료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여러 친구나 가족들이 환자를 병원에 동행하거나 문병하는 문화로 인해서 2차 감염이 더 확산됐을 수 있다”는 WHO 측의 지적도 새겨들어야 한다. 메르스가 처음 발생한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서는 문병이나 가족간병의 관행이 없어 메르스가 한국만큼 빠르게 확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의 병원문화에서 안전을 필수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됐다.

특히 가족 간병은 한국과 대만에만 남은 독특한 의료문화다. 환자와 가족을 병원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간병을 병원시스템 테두리 안으로 흡수하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한국의 의료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이 이번에 입증됐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인에 드는 비싼 비용은 환자와 가족 입장에선 부담이다. 하지만 비용 없이 안전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게 판명됐다. 이제는 환자와 보호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병원에서 간병을 전담하고, 소비자는 그 비용을 부담하는 사회적 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WHO 합동평가단의 지적은 우리에게 의료시스템과 의료문화의 대대적인 개혁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겼다. 의료는 우수한 인력과 자원, 투자를 넘어서서 인간이 만드는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도 됐다.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시민 개개인이 각자 무엇을 해야 할지 활발한 논의를 시작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