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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9>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92)|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무렵에 박종화는 좌익패와 떨어져 집에서 혼자 역사책만 읽고 있었다. 김기진이 처음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제창할때에는 박종화도 정의감에서 동조하였지만 얼마못가 그와 떨어져 좌익문학패와 관계를 끊어버렸다. 박종화의 부유한 가정형편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역사소설에 흥미를 가져『백조』잡지 제3호에 신숙주 부인의 이야기를 테마로 한 단편『목매는 여자』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나는 편집국장 김형원한테 다음에 실을 역사소설에 처음 솜씨이지만 월탄이 어떻겠느냐고 의논하였다. 그랬더니 시인인 석송 편집국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월탄이 무슨 역사소설이오….다른 사람을 골라요.』하고 말도 못 붙이게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월탄하고 석송은 사이가 퍽 좋지 않았다. 월탄이 잡지 『개벽』에다 석송의 시를 평해서 시조와 시를 뒤범벅해서 만들어 놓은 일소에 붙여버릴 작품이라고 혹평한 것이 원인이 되어 두시인은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송뿐만이 아니라 횡보도 월탄 말을 듣고서 씁쓰레한 얼굴로『글쎄, 월탄이 소설을 써! 그사람이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 모르지만 난 얼른 찬성할 수 없는데.』하고 역시 난색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과 의논하고 부사장 이상협한테 직소 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 부사장은 좋다고 『쓴다고 하거든 써보라.』고 하였다. 다시 내가 석송과 횡보가 다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쓸데없는 시기야! 시험조로 한번 쓰게 해봐요. 사람이 성실하니까 잘 써보려구 정성을 들일거야.』
이렇게 쾌락을 받았지만 그러나 유력한 두사람이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겁이 났다. 그래서 미적미적하고 있었는데, 그즈음 월탄이 우리들을 술먹으러 오라고 청하였다. 백화를 앞장세우고 횡보·행인, 내가 봉래동 월탄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이 무슨날이었는지 음식을 많이 차리고 손님도 우리들 외에 가람 이병기·안서·지용등이 와서 열사람이나 큰 교자상에 앉아 먹게 되었다.
지용과 행인은 둘이 다 해학과 독설로 유명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입씨름이 되고 이것이 더 심하면 큰소리를 내게되므로 나는 이 두사람을 처음부터 떨어진 자리로 갈라 앉혔다. 이날도 어느 틈에 두사람이 붙어 앉아서 입씨름을 시작하므로 다시 다른 자리로 떼어 앉히고 나는 주인인 월탄옆으로 다가앉아서 넌지시 『월탄, 역사소설 써볼 생각 없소?』하고 물었다.
『역사소설? 내가 무슨 역사소설이오!』
『나는 「목매는 여자」를 읽은 생각이 나는데-』
『허허, 그때는 그저 한번 써 본거지, 소설이 얼마나 쓰기 어려운데 함부로 손을 대요.』
이대답을 듣고 나는 맥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가람 이병기가 월탄한테 시조이야기를 걸어와서 나와의 이야기는 끊어져 버렸다.
그날은 무슨일인지 지용이 나보고 일찍 가자고 해서 둘이서 자리를 떴다. 그때 지용의 집은 교동 보통학교 아랫골목에 있었고 내집은 교동 학교 윗골목에 있었으므로 구인회 회합에서나 월탄집에서 돌아올때면 늘 동행이 되어 돌아왔다.
둘이서 낙원동 골목에 들어서면 그일대는 술집 투성이어서 오뎅집·바·선술집·맥주집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지용은 입가심을 한다고 마음내키는 대로 어느집이고 들어갔다. 지용이 그날은 『따끈한 정종 한잔씩 하지』 하고 커다란 컵에 따른 정종을 한잔씩 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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