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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이달에도 엄청나게 많은 새 작품들을 읽었다. 풀빛사에서 나온 양성우의 『낙화』, 강은교의『붉은 강』, 김준태의 『국밥과 희망』,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같은 시집들을 비롯하여 「문예중앙」가을호와 「신동아」11월호에 실린 고은의 신작 l5편과 기타 월간지·계간지·부정기 간행물 등 허다한 작품들이 발표되어 그야말로 우리 시문학 사상 전례없는 물량적 성황을 이루고 있다.
80년대 한국시의 발전은 물론 이런 단순한 양적 팽창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문학은 지난 십수년간의 절실한 경험을 통해서 이 나라 사회의 각 계층·각 방면과 진실한 연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단지 문학적 관심의 평면적 확장만을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 자체의 본질적인 성숙과 개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룡 김지하의 『대설 ·남』을 비롯한 서사시·연작시·이야기시·노래시·벽시 등의 다양한 형식적 시도들은 지금까지 한국시의 당연한 관습으로 굳어져온 서정시의 미학적 자기 폐쇄성을 깨뜨리고 민중현실의 주체성에 보다 실천적으로 결합되어 가고 있다.
서정시의 전통적 틀을 고수하는 시인들의 경우에도 우리는 서구중심적 문학이론에의 종속성으로부터 벗어난 민족언어의 승화된 표현을 보게 된다.
예컨대 고은의 최근 시들은 국토에 대한 애정과 농민적 삶에 대한 연민을 활달한 수사법 속에 담아내고 있으며, 양성우의 시집 『낙화』는 지난날 그의 시에 일부 남아 있던 관념적 조급성을 극복하여 예리하면서도 단단한 시적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고, 김준태의 『국밥과 희망』은 이 시인 특유의 건강하고 낙관적인 가락으로 참된 평화와 인간적 사람이 이땅에 도래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처럼 왕성하게 진행되는 문학작업의 성과들 중에서도 단연코 빛나는 노동시집 한 권을 최근 우리는 가지게 되었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해설자의 말대로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히 담아낼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향한 주체적 일어섬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일궈내는 민중의 정서를 탁월하게』보여준 업적으로서, 생각컨대 이 시집은『객지』등이 70년대 문학사에서 획득한 것과 비견될만한 분수령적 의의를 이 시대의 문학사에서 가질 것이다.
그만큼 이 시집에 담겨진 노동현실·생활현실의 체험은 직접적이고 표현은 치열하며 결의는 단호하다.
그러나 『노동의 새벽』에서 이 시인이 이루어낸 진정한 승리는 예술적 간격을 용납치 않는 그 압도적 현장성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개별성에 매몰되어 울분·탄식·절망·체념의 정서로 도피하지 않고 이를 보편적 인간현실의 문제성으로 객관화시킬 수 있었던 점이다. 물론 과거에도 민중현실의 핵심적 부분으로서 노동문제를 다룬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경림·정희성의 어떤 작품들, 최근 박영근의 『취업공고판 앞에서』가 그렇다.
그러나 대체로 현장 바깥에선 지식인의 관점을 버릴 수 없는데서 오는 한계 또는 경험을 단순히 소재로 활용하는 듯한 문학주의적 편향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박노해의 뛰어난 점은 현장의 운동 속에 철저히 남아 있음으로 해서 도리어 문학적으로도 간극없는 정서를 창출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든 이 시집은 우리시대의 모든 잠든 의식을 향해 발해진 통렬한 예술적 저격으로서, 우리는 그의 깨달음과 실천이 더 넉넉하고 튼튼하고 깊어지는 가운데 문학과 역사를 아울러 밀고 나감으로써 민족문학의 우렁찬 대열에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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