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즐거움|생각하는 삶을 위하여|도덕율 지키는 것이 「참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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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이 왜 옳은지 물으면 당황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살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 등 해서는 안될 일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으나 왜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는지 설명하려면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종교의 경전에서 그런 것을 금하고 있다거나 웃어른, 혹은 현행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러한 이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에 종교가 없더라도, 혹은 어른들이나 법이 그것을 강요하지 않더라도 왜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칸트」(Immanue kant)는 그의 이른바 「의무의 윤리학」에서 이 문제와 부닥친다.
그는 비록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왜 인간은 여전히 윤리적이어야 하는지의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그 법칙이 무엇인지를 규명해내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칸트」는 믿고 있었다.
그는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무수한 별들이 질서정연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자연의 법칙, 즉 인과율이 있듯이 인간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자유의 법칙, 즉 도덕률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나쁜짓을 저질렀을 때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괴로워 한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 법칙이 과연 무엇일까.
「칸트」는 도덕률을 찾기 위해 우선 무엇이 「최고의 선」(summum bonum) 인지를 규명한다. 여기서 그는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는데 최고의 선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행위의 결과로 나오는 우연적 부산물이어서는 안된다는 것, 무엇을 위한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것, 그리고 아무 제한이 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선한 것 등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그는 인간의 높은 지성이나 예리한 판단력, 혹은 용기나 담대성 따위를 먼저 제외시킨다. 이러한 것들은 상황에 따라 악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부귀나 명예, 행복 같은 것도 행운의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제거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으로 가장 높은 선인가? 「칸트」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것은 「선의지」(der gute wille) 단하나 뿐이라고. 선의지는 행위의 결과와 상관없이 선한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조건없이 선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추구하는 그 태도 때문에 선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을 『도덕률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률이 무엇인지 아직 몰라도 좋다.
내가 아는 한 도덕률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지켜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행동하면 그것이 곧 최고의 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선물을 받을 때 상자속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따라 얼마만큼 고마와하고 때로는 불쾌하게까지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와하는 태도와 비견될 수 있다. 그런 뜻으로 「칸트」의 도덕률이란 텅빈 상자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텅빈 상자가 상자라는 특성만 간직하고 있듯이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 도덕률이란 법칙으로서의 특성, 즉 법칙성만을 규정할 뿐이다.
그렇다면 법칙성 다시 말해서 어떤 법칙이 법칙으로서 자격을 갖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대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도덕률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만 규정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을 그렇게 적용한단 말인가. 아무것이라도 좋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신조, 혹은 「칸트」의 용어로 「격률」(maxime) 이 있는데 이것이 자기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곧 도덕률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조건을 단서가 붙지 않는 무조건적 명령의 형식에 담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네 의지의 격률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요컨대「칸트」는 『성경』의 황금률을 이렇게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이것이 별로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자공이 평생토록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때 공자는『그것은 용서뿐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 일이다』 (기서호 기소부욕 물시어인)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소위 「정언명법」(kategorischer Imperativ)과 근본적으로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이 명법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행복이나 명예, 혹은 권력따위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하여 지켜야하는 조건인 것이다.
이제 「칸트」의 입장에서 볼때 왜 우리는 거짓말이나 살인, 혹은 간음을 해서는 안되는지 이유가 분명하다. 그것은 경전이나 웃어른, 혹은 법이 금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언명법, 즉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해도 좋은지 묻는 조건에 어긋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만을 가지고 행위하는 것을 그는 의지의 「자율」(Autonomie)이라고도 말한다.
행위의 동기나 이유를 오로지 자기자신 안에서만 찾기 때문이다. 종교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법질서가 무너져가며 전통적 가치관이 마구 짓밟히는 이 어려운 시대에 「칸트」의 준엄한 가르침을 우리는 매우 소중하게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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