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만군도 등 약소국 공략 … 블라터 승리 뒤엔 ‘1국1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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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카리브해의 케이만군도는 제주도의 7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인구는 2012년 기준 5만6000여 명. 조세피난처로 알려져 있지만 국제 정치에서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로 가면 위상이 달라진다.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된 제프리 웹(50) FIFA 집행위 부회장이 케이만군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제프 블라터(사진) 회장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케이만군도에 대한 FIFA의 지원도 파격적이었다. FIFA는 2008년 이후 180만 달러(약 20억원)를 지원했다. 두 개의 축구장 건립 비용이었다. 7년이 지나도 축구장은 완공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조잔디를 심는다는 명목으로 남은 지원금 50만 달러가 지급됐다. 케이만군도의 FIFA 순위는 209개 회원국 중 191위.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나가보지 못했다. 전 국민이 다 모여도 상암 월드컵경기장(6만6800석)을 채우지 못한다. FIFA의 축구장 건설 지원은 한마디로 과잉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블라터 회장의 17년 철권통치 비결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FIFA 회장 선출은 철저히 ‘1회원국 1표제’로 이뤄진다. 축구 강국인 스페인·독일·브라질도 케이만군도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1표다.

 블라터는 축구 약소국과 저개발국을 공략했다. 축구 저변 확대를 명분으로 내세워 축구장 건축 비용 등으로 연간 수십만 달러를 후원하고, 대신 자신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FIFA 예산을 활용한 선심성 지원이었다.

 블라터는 자신을 배척하는 축구 강대국 대신 약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나갔다. 이 전략은 최근 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유럽과 미국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의 소국들이 결속하면서 블라터의 5선을 이끌었다. 축구 민주화가 블라터의 장기 독재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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