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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 소지 있지만 국회의 견제 권한 인정돼야

중앙일보

입력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 요구권한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은 위헌(違憲)일까. 국회와 청와대가 설전을 벌이고 있지만, 법학계에선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상국가라면 모법(母法)인 법률의 취지와 내용에 맞지 않는 시행령이 자주 나와선 안 되며, 이를 통제할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 75조는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 받은 사항과 법률 집행을 위해 필요한 사항에 대해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문대로라면 시행령은 법률의 내용과 취지에 맞게 제정돼야만 한다. 어긋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논란을 벌이기 전에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시행령 그 자체가 위헌이란 의미다.

위헌적 상황 전제하는 국회법 개정안
현대 법치국가에선 헌법>법률>명령>조례>규칙 순으로 우선 순위를 정해 법을 적용한다. 상위법은 하위법에 우선하며, 하위법은 상위법에 위배될 수 없다. 법학개론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은 ‘교과서 밖 상황’을 전제한다. 명령에 속하는 대통령령·부령 등 시행령이 상위법인 법률의 내용과 취지에 어긋난다는 전제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에 대한 논란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정부의 행정입법이 국회가 만든 법률의 취지를 희석시키거나 무력화한 경우가 많았다는 게 국회의 지적이다.
지금도 어린이집 누리과정의 재정부담 주체를 놓고 영·유아보육법 시행령과 상위법인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이 충돌을 빚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의 예비 타당성조사를 받지 않게 한 국가재정법 시행령은 법원에서 ‘모법의 위임범위를 벗어났다’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무리한 행정입법이 많다곤 하지만 이번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 논란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순수한 법리로만 따지면 위헌요소가 없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견해다. 국회가 행정부의 시행령 제정권한에 간섭하는 것이 헌법상 권력분립의 원칙에 위배되고, 헌법이나 법률에 위배되는 명령의 최종심사권한이 대법원에 있다는 헌법 조항(107조)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의 이의제기 절차도 없이 국회의 시행령 수정요구권한만 법제화하는 건 위헌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도 지난 29일 브리핑에서 “정부 시행령을 국회가 좌지우지하는 듯한 (국회법) 개정안은 행정부 고유권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헌법상 권력분립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과도한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견제가 단순 법리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도 의회와 행정입법은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우리나라처럼 터무니없이 상위법에 배치되는 행정입법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음에도 그렇다.

국회의 행정입법 견제장치 마련돼야
미국은 행정입법에 대한 의회의 거부권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다. 하지만 1983년 연방대법원이 ‘이민귀화국 대 차다(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 vs Chadha)’ 사건에서 의회의 거부권 행사조항을 위헌 판결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법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장기 거주한 불법체류자에게 추방을 유예할 수 있게 해주는 당시 이민법이 심판 대상이 됐다. 이민법에는 추방유예 결정이 내려져도 상·하원 중 어느 한쪽이라도 ‘입법적 거부권(Legislative Veto)’을 행사하면 이민국의 판단을 뒤집을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연방대법원은 이 조항을 위헌으로 봤다. 의회의 직접적인 거부권 행사는 삼권분립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판결은 역설적으로 미국 의회의 입법적 거부권을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의회는 직접적인 거부권 행사 없이 정부의 행정입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행정부에 대한 입법권 위임을 최소화하고 ^모법에서 상세하게 규율하며 ^행정입법에 대한 예산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방법이다. 96년에는 연방행정절차법에 ‘행정입법 의회조사제도(Congressional Review of Agency Rulemaking)’를 만들어 행정입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이전 단계에서 의회의 충분한 검토를 받도록 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차다 사건 이후 미국 의회의 입법적 거부권이 더욱 정교해지고 정부의 행정명령에 대한 견제가 확대되고 있다”며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적 대통령제의 전통이 강하고 행정부에 법률안 제출권한이 주어져 있는 나라에서는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감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회가 만든 법률과 행정부의 명령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소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헌법 107조는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대법원은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했다. 이를 근거로 사법부나 판사 출신 국회의원들 사이에선 “정부 시행령이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판단할 권한은 법원에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법학계에선 상·하위법 간 모순 때문에 권리가 침해 당해도 재판을 통하지 않고선 구제받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이 최종심사권한을 갖고 있지만 헌법 조항대로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가 아니면 구제받을 길이 없다”며 “세월호특별법에서처럼 공공기구의 조직을 구성하거나 예산을 책정하고 국민에 시혜적인 행정행위를 할 때 시행령이 법이 위임한 범위를 벗어나더라도 소송을 하지 않고선 고칠 방법이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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