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1)|<제81화>30년대의 문화계|「구인회」발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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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기림은 함북 경성출신으로 일본대학을 나왔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모더니스트로 날리던 젊은 시인이었다.
그는 나중에 방응모장학회에서 학비를 받아 일본 동북제대 영문과를 나오기도 하였다. 호탕하게 잘 웃지만 속은 빈틈 하나없는 사람이어서 한주일마다 시간표를 짜 어느때 책 읽고, 어느때 시 짓고, 어느때 회합에 나가고 하는 스케줄 그대로 실행해 나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지용도 기림을 시인으로 한몫놓았고 기림은 이상과 매우 가까와 해방후 백양사에서 나온 이상선집에 긴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무영은 본명이 이무길인데 휘문고보를 나온뒤 동경에 건너가 일본의 통속작가인 가등무웅집 서생으로 있으면서 소설수업을 하였다. 귀국하여 염상섭에게 사사하였고 그뒤에『문학타임즈』라는 타불로이드판의 얇은 문학잡지를 경영하면서 동아일보 학예부의 객원으로 있었다.
이것으로 구인회 아홉사람의 면면을 소개했는데, 예정대로 이효석이 7월 스무날께 여름방학으로 상경하였으므로 스무며칠날이던가 종로 광교천변에 있는 조그마한 양식집에 저녁때 모여 발회식을 가졌다.
모든 것을 상허 이×준이 리드하게 되어 사실상의 회장은 그였고 지용은 해학으로 옆에서 거들었다.부회장 격이였다.
먼저 회이름을 정하는 일인데 회원들로부터 여러가지 이름이 나왔지만 다 마땅치 않았다. 마침내 상허가 아홉사람이 모였으니 아주 평범하게 구인회라고 하자고 제의하였다. 여러사람이 찬성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일본의 십삼인구악부를 본뜨는것 같아 창피하다고 했더니 모두들 그러면 어떠냐고 그래서 구인회로 결정되었다.
이야기란 그 달에 발표된 회원들의 작품평, 「카프」 측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을 주로해서 잡담을 두어시간 떠들었다. 이종명·김유영은 아무 말도 안하고 끝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렇게해서 다음번 모임 날짜를 정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번 회합에 벌써 틈이 벌어져 유치진이 안 나오고, 세번째 모임부터는 이종명·김유영이 탈퇴하겠다고 통고하고 안 나왔다.
유치진은 처음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내가 강권해서 들어왔지만 여러사람과 잘 모르는 터이므로 서먹서먹했고, 또「극연」 패들이 무어라고 했는지 알수 없었다. 유치진은 첫번째 회합이 파해서 갈 때 나를 보고 다음부터 안 나오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극력 만류했지만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종명으로 말하면 자신이 이회를 처음에 발기한 터이니만큼 안 나와서는 안되지만 처음 계획으로는 자기가 헤게모니를 쥘줄 알았는데, 그것이 틀려 상허가 회장 행세를 하는 것이 불쾌했고, 또 신문 기고가의 「섹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종명 자신이 상허한테 중앙일보에 자신의 소설을 싣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이것이 완곡하게 거절되었으므로 이일 저일이 다 불쾌해 그만둔 것이었다. 유영은 처음부터 화려하게 출발해 「카프」 패들과 큰 싸움을 벌이고 싶었는데 횡보도 안 나오게 되고 모두 소극적인 것에 실망했다. 더구나 상허·지용이 판을 치는데 불쾌했을 것이고 이래서 두 사람이 의논하고 탈퇴한 것이었을 것이다.
세번째 회의에는 종명·유영·치진이 불참하고 이효석이 경성으로 돌아가 네사람이 빠졌다.
나머지 다섯사람이 모였는데, 제일 궁지에 빠진 것이 나였다. 처음에 같이 시작한 종명·유영이 탈퇴하겠다고 자빠지고 내가 주장해 가입시킨 유치진이 안나와 나는 입장이 몹시 난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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